혼자 꾸던 꿈은 혼자일 뿐, 함께한 꿈은 인생이 된다.
1983년 봄, 나는 불안정한 거처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내 곁에는 군 복무 시절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정성껏 돌봐준 여자친구가 있었다.
나는 깊은 고마움과 믿음 속에서 결혼을 결심했다.
당시 26세, 남자에게는 다소 이른 나이였지만,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은 말 그대로 ‘빈 주머니에서 시작한 인생’이었다.
월급의 대부분을 어머니께 보내던 터라,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혼집 전세금과 살림살이의 대부분은 아내가 직접 마련했고,
나는 새마을금고에서 100만 원을 대출받아 겨우 결혼식 비용에 보탰다.
그럼에도 장인, 장모님께서는 나의 성실함 하나만을 믿고 흔쾌히 결혼을 허락하셨다.
그분들의 신뢰와 지지는 지금까지도 내 삶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결혼 후, 우리는 서로에게 배우며 살아갔다.
아내는 반공연맹(현 자유총연맹)에 근무하면서
나보다 높은 급여를 받으며 가정의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임신과 심한 입덧이 그녀를 괴롭혔다.
결국 직장을 내려놓아야 했던 그 결단은
책임감이 강한 그녀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출근길마다 아내를 두고 떠나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고,
그녀의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아팠다.
1984년 1월,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아침.
우리의 첫아들이 세상에 태어났다.
눈처럼 맑고 깨끗한 그 아이의 울음소리는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동시에
새로운 책임의 무게를 안겨주었다.
그날 이후 아내는 아이를 위해 하루하루를 헌신했고,
나는 그들의 울타리가 되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일했다.
결혼 후 우리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전셋값이 오를 때마다 불안은 커졌고,
결국 인천 구월동의 11평 아파트에서 단칸방으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때 나의 진심을 알아본 상관이 새로 지은 집의 지하방 두 칸을 시세보다 훨씬 저렴하게 내주며
“애 키우기 힘드시죠? 여기서 조금이라도 편히 지내세요.”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의 따뜻한 배려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남았다.
새 보금자리에 짐을 들여놓던 날,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볕이 잘 들지 않는 반지하였지만,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안식처였다.
추운 겨울, 함께 이불을 덮고 아이를 안은 채 웃던 그 순간들.
그 시절,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부족했지만
삶의 의미와 진정한 풍요로움을 누구보다 깊이 느끼고 있었다.
독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에게 ‘진정한 삶의 풍요’란 무엇인가요?
물질이 아닌 마음으로, 사랑으로 충만했던 그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리움도 지나면 힘이 된다》 제10장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이 풍요로웠던 그 시절,
그것이 나의 삶이 시작된 진정한 출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