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위는 높아져도 마음은 더 낮아져야 했다.”
1987년, 드디어 사무관 승진시험의 기회가 찾아왔다.
10명 선발에 45명이 지원했으니, 나는 사실상 꼴찌 순번이었다. 준비는 부족했고,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첫 번째 시험에서 쓴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듬해,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나라를 달구고 있을 때, 나는 둘째 아들을 얻는 겹경사의 해를 맞았다.
그러나 기쁨과는 달리 시험공부에만 집중하기란 쉽지 않았다. 두 번째 승진시험에서도 나는 아깝게 11등,
한 끗 차이로 낙방했다.
국방부 내에서 기대를 모았던 젊은 직원의 두 번의 실패. 체면이 서지 않았다.
올림픽 중계에 빠져 공부를 게을리했던 순간들,
복잡한 결산 업무에 묻혀 스스로를 다그치지 못한 지난날이 뼈아팠다.
재정국엔 ‘세 번 이상 낙방하면 평정이 불리하다’는 보이지 않는 압박이 있었고, 그것은 내 어깨를 더 무겁게 눌렀다.
하지만 시련은 내게 다른 선물을 남겼다.
‘진정한 전문가란 실패를 견디며 스스로를 단련하는 사람’이라는 깨달음이었다.
1989년,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해 봄, 나는 모든 것을 걸고 세 번째 승진시험에 도전했다.
국장님은 내 간절함을 헤아려 한가한 보직으로 배려해 주셨고,
나는 그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밤낮없이 공부에 몰두했다.
그리고 10월, 마침내 1등으로 합격했다. 공직 입문 12년 만의 값진 성취였다.
첫 사무관 보직은 군수국 군수기획과. 전시 군수물자 지원계획을 총괄하는 핵심 부서였다.
재정국 예산운영과에서 8년을 보낸 끝에 드디어 열린 새로운 문이었다.
그날, 국장님은 내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지위는 높아져도 마음은 더 낮아져야 한다. 다시 재정국으로 돌아오지 말고, 더 넓은 세상에서 배우게.”
그 한마디가 내 공직 인생의 나침반이 되었다.
군수기획과에서의 첫 업무는 ‘전시 군수지원능력 판단’.
전쟁이 발발하면 계절과 기간에 따라 자원을 어떻게 확보하고 지원할 것인가를 분석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형식적 보고에 그쳤다. “설마 전쟁이 일어나겠어?”라는 무심한 말이 공기를 메웠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나중에는 늦는다.”
나는 각 군과 기관을 직접 찾아가 실무를 점검했고, 전산 시스템을 새로 손보았다.
을지연습에 적용하자 데이터는 오류투성이였다. 숫자 하나하나가 현실을 비켜 있었다.
나는 실무자들을 격려하고, 우수직원을 표창하며 개선안을 보고했다.
육군 소장이던 국장님은 내 노력을 높이 평가했고,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오랜만에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해 10월, 재정국의 갑작스러운 요청이 내려왔다. “다시 도와주게.”
나는 아직 개선안을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복귀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한창 피어나던 열정이 바람에 꺼지는 듯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이상하게도 담담함이 있었다.
언젠가 다시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1990년 가을, 복도에서 마주친 재정국장은 다급했다.
“결산 담당 사무관이 일을 할 수 없게 됐네. 국회 결산 심의가 코앞인데, 자네가 좀 도와주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는 나보다 여섯 해 먼저 사무관이 된 동기들의 자리였다.
국장은 오랜 세월 묵묵히 결산 업무를 맡아온 내 전문성을 믿고 있었다.
나는 군수국장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어떤 결정이든 따르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비공식 파견 형식으로 재정국으로 돌아왔다.
정식 인사 명령은 1991년 3월 16일에 내려졌다.
다시 익숙한 자리로 돌아온 나는 일의 흐름을 알고 있었다.
손끝의 감각이 살아 있었고, 판단은 한결 여유로웠다.
그즈음 우리는 상계동 공무원 임대아파트로 이사했다.
아이들은 건강했고, 국장님이 타던 ‘르망’을 물려받아 가족과 전국을 여행했다.
강원도의 산과 거제도의 바다가 그 시절 우리를 품었다.
이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고요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오랜 시련 끝의 숨 고르기, 그리고 다시금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성장은 오르는 일만이 아니라, 멈춰 서서 자신을 다지는 일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