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배움의 길 위에서 다시 꿈을 만나다

“책장보다 교실이 그리웠다. 매움은 언제나 나를 다시 일으켰다.”

by 황희종

1993년 1월, 찬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재정국 국장님께서 어느 날 나를 부르시더니, 신문에서 오려낸 작은 광고 하나를 내밀었다. ‘독학사 제도’에 관한 안내문이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고졸자에게 국가가 일정한 시험을 통해 학사학위를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종이 한 장이 내 인생의 또 다른 문을 열어주었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학력 콤플렉스’라는 보이지 않는 굴레 속에 있었다.
고등학교 성적은 하위 10%, 대학 진학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방송통신대에도 일곱 번이나 낙방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재정국장님은 그런 내 사정을 알고 계셨다.
“야간대라도 다녀야지, 공부를 멈추면 안 돼.”
그분의 말은 늘 다정하면서도 뼈가 있었다.
그날, 아무 말 없이 내 손에 쥐어진 신문 조각은 ‘한 번 더 해보라’는 따뜻한 격려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1년 안에 끝내겠습니다.”

독학사는 4단계 시험으로 이루어졌지만, 다행히 7급 공무원 합격자는 1·2단계가 면제였다.
남은 3·4단계만 통과하면 된다.
퇴근 후의 사무실은 늘 내 공부방이었다.
책상 위에는 영어 단어장과 행정학 교재, 그리고 찬물 한 잔.
조용한 복도 끝에 들려오는 청소 도구 소리와 형광등의 윙윙거림이 공부의 배경음이었다.
그렇게 맞이한 1993년 여름, 나는 3단계 시험에 합격했고, 겨울에는 4단계 시험까지 한 번에 통과했다.
그리고 1994년 2월 17일, 교육부장관 명의의 ‘행정학사’ 학위를 받았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종이 한 장이었을지 몰라도,

나에게 그 학위는 오랜 세월 억눌렸던 자존심을 되찾아준 명예의 증표였다.
그날 나는 스스로를 향해 말했다. “이제 나도 해낼 수 있다.”

그러자 마음속에 또 다른 꿈이 자라났다.
대학원 진학, 그리고 해외 유학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16년 동안 잊고 살았던 영어가 나를 가로막았다.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었다.
유학을 다녀온 동기에게 상담을 구하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할 수 있어. 당신이라면 해낼 거야.”
그 한마디가 내 안의 불씨를 다시 살렸다.

영어책을 펼쳤지만, 처음엔 한 페이지도 넘기기 어려웠다.
단어는 낯설고, 듣기는 백지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옆 사무실에서 유학을 준비하던 후배에게 도움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던 중, 1995년 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유학 예정 공무원을 위한 20주 영어 연수과정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각 부처당 단 한 명만 갈 수 있었다.
시험이라도 보자는 마음으로 응시했지만, 첫 토플 점수는 375점.
함께 응시한 동료는 515점이었다. 면접에서는 긴장으로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했지만, 며칠 후 인사계에서 연락이 왔다.
“다른 부처에서 한 명이 포기했습니다. 우리 부처에서 추가로 보낼 수 있습니다.”
그날의 통화는 내게 기적 같은 선물이었다.

외대 연수 동안 나는 다시 수험생으로 돌아갔다.
매일 새벽 신문을 읽으며 모르는 단어마다 붉은 밑줄을 그었다.
밤에는 강의 녹음을 들으며 문장을 따라 말했다.
20주가 끝날 무렵, 토플 점수는 475점으로 올랐고,
신문 속 모르는 단어는 이제 1%도 남지 않았다.
그 후 527점까지 올렸지만, 국비유학 기준인 530점에는 모자랐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외국어대 어학 검증시험에서 72점을 받으며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이었지만, 나는 끝내 해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건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끝까지 버티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관문은 남아 있었다.
미국 대학의 정식 입학 허가를 받아야 했다.
여러 대학에 지원했지만 돌아오는 건 거절 통보뿐이었다.
유학원들조차 “독학사 학위로는 어렵습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모든 문이 닫히는 듯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유학원에서 “가능성은 낮지만, 한 번 시도해 보죠.”라며 나서주었다.
그 인연으로 나는 우리나라를 방문한 웨스턴일리노이대학교 관계자와 면담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독학사의 의미와 내 공직 경험, 그리고 배움에 대한 열정을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들은 오랜 논의 끝에 ‘조건부 입학’을 허락했다.

학교 어학시험을 통과해야 했고, 대학원 진학 전 학부 과목 다섯 개를 이수해야 했다.
그 후 1년 안에 대학원 30학점을 모두 마쳐야 했다.
모두가 “그건 불가능하다”라고 했지만, 나는 조용히 말했다.
“하겠습니다.”

그 한마디에는 내 지난 삶이 모두 담겨 있었다.
낙방의 기억도, 새벽의 단어장도, 불 켜진 사무실의 고요도.
돌아보면 나는 늘 그렇게 걸어왔다.
넘어져도 일어나고, 멈춰도 다시 걸어가는 사람으로.

그리고 이제 안다.
배움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늦은 배움의 길 위에서도,
사람은 언제든 다시 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시련 속에서 단련된 전문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