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이 아닌 신뢰로 오른 자리, 기획조정실장이라는 무게를 마주하다
2014년 9월 1일.
그날은 제 공직 인생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큰 울림을 남긴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국방부 기획조정실장으로 임명되었고, 이 소식은 저 스스로도 쉽게 믿기 어려울 만큼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일반직 7급으로 시작한 한 평범한 공무원이, 장군이나 고위직 출신이 맡아오던 국방부 최고 핵심 보직에 오른다는 것은 관례를 넘어선 일이었습니다. 당시 국방부에는 1급 실장자리가 5명이었지만 일반직 공무원은 단 하나였으며 , 수십 년간 예비역 장군이나 기획재정부 출신 관료들이 맡아온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 질서 속에서 저의 임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저 역시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기쁨은 잠시였고, 제게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무게’였습니다. 너무 무거워 손끝으로 감히 만질 수도 없을 것 같은 책임의 무게. 36년 7개월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제 공직의 시간들이, 마치 이 자리 하나로 모두 검증받는 듯한 압박이 밀려왔습니다.
저는 군 장성도 아니었고, 행정고시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스펙이나 출신이 아니라, 제가 걸어온 길에서 얻어진 ‘신뢰’였다고 생각합니다. 국방개혁의 여러 과정에서 흔들림 없이 추진했던 정책들, 동료들이 인정해 준 청렴함, 상사와 부하 직원들에게 보여주었던 진정성, 그리고 국방을 바라보는 저의 일관된 철학이 모두 쌓여 만들어 준 기회였습니다.
그 자리는 ‘실장’이라는 직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국방부의 기획, 예산, 조직, 정보화, 법령, 정책조정, 국회 대응까지—부처 전체의 움직임을 조율하고 책임지는 자리였고, 수많은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곳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수십만 장병과 가족들의 삶이 달라지고, 국가 안보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자연스레 숨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임명장을 받은 그날, 저는 혼자서 조용히 제 책상 앞에 앉아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과연 이 자리에 합당한 사람인가.”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질문을 가슴속에 깊게 새겼습니다.
그 물음은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무게를 견뎌낼 각오를 다지는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돌아보면, 제 공직의 길은 화려하거나 거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늘 부족함을 느끼며 한 걸음씩 내딛다가, 어느 순간 7급으로 시작했던 발걸음이 1급의 문 앞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펙으로 자리를 얻고, 어떤 사람은 운으로 기회를 얻지만, 결국 가장 멀리 가는 사람은 ‘신뢰’를 쌓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획조정실장이라는 자리는 저의 마지막을 가장 빛나게 만들어 준 자리가 아니라, 제 공직 인생 전체를 돌아보게 만든 깊은 성찰의 자리였습니다. 책임은 늘 무겁지만, 그 무게를 견디고 나면 비로소 의미가 남는다는 것을 저는 그곳에서 배웠습니다.
36년 7개월의 시간이 그날 하나의 문으로 이어졌고, 저는 조용히 그 문을 열었습니다.
그 문 너머에서 다시 시작되는 또 다른 책임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그리고 담담하게 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