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해파랑길에서 만난 나

발걸음마다 새겨진 성찰

by 황희종

39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내려오던 날, 축하의 말이나 꽃다발은 제 마음에 오래 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슴 깊은 곳에 하나의 질문만 남았습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향해 걸어야 하는가.

퇴직 직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 정당으로부터 캠프에 함께하자는 제의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공직 생활 내내 정치적 중립을 제 삶의 중요한 가치로 지켜왔던 터라, 은퇴하자마자 정당에 몸을 싣는 선택은 제 마음과 맞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정당은 제가 현장에서 온몸으로 겪었던 사드 배치를 강하게 반대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제의들을 조용히 사양했습니다.

그 대신, 전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부산 송도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해파랑길 770킬로미터를 걷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2017년 3월19일, 저는 서울역에서 부산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목적지는 해파랑길의 시작점인 부산 송도. 사람들은 왜 걷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웃으며 대답을 피했습니다. 사실 저 스스로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오랜 시간 제 안에 쌓여 있던 무게를, 바람과 파도에 조금씩 내려놓고 싶었을 뿐입니다.

해파랑길 완보.jpg


해파랑길은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시작해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길입니다. 파도의 해(海), 햇살의 파(波), 푸른 빛의 랑(浪)이 만나는 길. 저는 그 길이 단순한 여행 코스가 아니라, 나 자신과 다시 마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휴대전화는 꺼두었고,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프면 식당을 찾았고, 숙소가 나올 때까지 걸었습니다. 어떤 날은 밤 열 시가 되어서야 발을 멈췄고, 물집이 잡힌 발을 끌고 다음 날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농촌의 푸근함, 어촌의 활기, 산촌의 고요함, 도심의 분주함을 지나며 저는 이 땅이 품고 있는 다양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결국, 세상을 다시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저는 비로소 ‘직함 없는 나’와 조금씩 친해지고 있었습니다.


5월 31일, 저는 강원도 고성 명파초등학교 앞에서 출발해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12.3킬로미터는 군사 작전 지역이어서 신분 확인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우리 땅이지만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국방과 분단의 의미가 다시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제가 걸어온 이 길이 단순한 도보 여행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퇴직 후의 시간은 휴식이 아니라 재생의 시간이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속도와 숨결을 익히는 시간, 다시 나 자신으로 살아보는 연습의 시간이었습니다. 해파랑길은 제게 이렇게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그동안 수고했어. 이제는 너의 삶을 걸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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