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자리를 떠나도, 지혜는 남는다.
퇴직은 끝이 아니라 거리의 조정이었다.
직접 결재선을 넘나들던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국가 안보를 향한 책임의 끈까지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한 걸음 물러난 자리에서, 나는 국방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퇴직 이후, 장관의 배려로 2017년 4월부터 2019년 8월까지 국방과학연구소 정책기획부 책임관리원으로 위촉되었다. 정년을 2년 남겨두고 자발적으로 은퇴한 나를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일주일에 이틀 출근하는 비교적 여유로운 일정 속에서, 나는 오랜 공직 생활을 정리하며 국방 분야의 흐름을 한발 물러나 지켜볼 수 있었다.
실질적인 깊은 자문보다는 지인들과 안부를 나누고, 연구소의 분위기와 연구 방향을 관찰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내게 결코 가볍지 않았다. 치열했던 공직의 중심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역할을 이어갈 것인지 사색할 수 있었던 소중한 전환의 공간이었다.
2017년 8월부터 2019년 8월까지는 국회 국방위원회 추천으로 국방부 방위력개선 추진위원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방위사업청 정책기획분과위원, 군수조달분과위원으로도 참여했다. 거의 매월 열리는 회의는 단순한 ‘참석’이 아니었다.
과거 계획예산관과 획득기획국장 시절의 경험을 다시 꺼내어, 그 토대 위에서 정책을 조율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무기체계 사업의 우선순위, 예산 배분의 타당성, 국산화 전략, 기술 도입의 필요성까지—모두 익숙한 언어와 논리였다.
나는 여전히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마음으로 회의 자료를 미리 검토했고, 실무자들의 고민을 대변하듯 신중하게 의견을 보탰다. 정책의 방향과 전략의 무게, 사업의 시기와 규모에 대한 판단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안보라는 무거운 책임과 예산이라는 냉정한 한계, 그리고 ‘효율과 전력’ 사이의 균형이라는 깊은 숙고가 늘 함께했다.
퇴직 이후에도 나는 국방정책의 맥을 놓지 않았다. 이전보다 조용한 방식으로,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선으로 대한민국 방위력의 다음 발걸음을 함께 고민하고 있었다.
또한 국방부 정책자문위원회 기획예산분과위원, 국방부 자체평가위원회 행정역량 분야 평가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전직 공직자이자 선배로서, 국방 정책과 예산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내가 가진 경험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비록 1년에 한두 차례 참여하는 자리였지만, 정책 설명을 듣고 분과별로 의견을 나누는 과정은 국방부의 고민과 후배들의 현실, 그리고 다양한 외부 시각을 한데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소통의 장이었다. 나는 언제나 실무자의 입장을 먼저 떠올리며 의견을 전했고, 국방의 미래를 걱정하는 진심 어린 조언을 보태고자 했다. 그것은 오랜 공직 생활의 연장이자, 후배들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는 마음에 가까웠다.
2023년 3월부터 2024년 2월까지는 한국국방연구원 연구과제 평가위원으로 활동했다. 매월 한 차례 진행되는 평가회의에서 연구 과제의 정책 부합성, 실현 가능성, 국방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심도 있게 검토했다.
형식적인 평가에 그치지 않기 위해, 나는 정책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최대한 녹여내려 노력했다. 연구가 연구로 끝나지 않고, 실제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것은 국방정책 발전을 위한 작은 기여였고, 연구자들이 보다 현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조용한 응원의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