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9층. 선택과 결정을 스스로 하게 된 이후의 이야기.
나는 언제 어른이 되었을까?
구청에서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때?
수능이 끝나고 한 해가 넘어가며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혼자 생활할 때?
남자라면 군대를 가는 시점부터?
이것도 아니라면... 결혼을 한 순간부터?
나는 위의 다섯 가지 질문을 적고 나서 차근차근 질문들을 다시 읽어봤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경험해 보면서 딱히 나 스스로가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와닿는 질문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어른이 되었을까? 아니, 어른이 되긴 한 걸까?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나를 성인이라고 정해놓고 있다.
하지만 성인의 정의를 봐도 어른과는 약간 다르게 정의돼있어 아리송하다.
[성인]
자라서 어른이 된 사람. 보통 만 19세 이상의 남녀를 이른다.
한 때 나는 나 자신을 어른이라 생각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선택을 시작해서였을까? 어쩌면 결혼까지 하고 나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가정을 꾸려서 더 그렇게 느꼈을테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을 당하고 나서 나 자신도 못 지킬 정도로 나약해졌다. 어쩌면 어른이 아니라 아이로 다시 변했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긴 했다. 머리부터 가슴까지 이성과 감성이 사라진 무감각으로 산다는 건 정말로 끔찍했다. 내가 무얼 하고 싶었는지 금세 잊어버리는 건 다반사였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더는 재밌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신혼집에 모든 걸 다 놔두고 나는 패잔병이 되어 부모님의 본가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뚜렷하다. 그만큼 내겐 더 이상 신혼집이라 불렸던 그곳이 '다신 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장소'로 변질돼 있었다.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부모님이 계시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렇게 나는 다시 등본상 부모님 밑으로 들어가 '어른'에 대한 정의가 모호한 캥거루족이 됐다.
하지만 캥거루족이 다시 됐다고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행복한 가정을 이뤄 이곳을 나갈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본가로 들어오는 대문 앞에서 스스로 다짐을 하면서 들어왔더랬다.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이것만큼은 꼭 이루고자 하는 목표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책을 읽다가 어른에 대한 정의가 정확한 표현을 봤다.
나 어른이 된 것 같아. 더 이상 보호자가 없잖아.
나는 이 표현을 보고 나서 머릿속에서 '띠용!'이라는 소리와 함께 느낌표를 띄웠다.
'부모님은 더 이상 나의 보호자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부모님의 사회적 보호자로서 의무는 이미 내가 학창 시절을 졸업하고 나서 그 역할이 끝났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역할이 서로 바뀌어서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면 보호자가 없다.
맞다. 이제부터는 선택에 대한 결정을 나 스스로 해야 한다. 이 표현을 가장 몸에 와닿게 느낀 건 곧 있을 법원 출석에서였다. 앞으로 있을 법정 싸움에서는 변호사님과의 케미도 중요하겠지만 스스로에 대한 결정이 가장 중요할 테다. 보호자는 없다. 내가 방패와 창이 되어 나 스스로를 지켜나가야 한다.
내가 나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던 날.
선택장애가 와서 결정들을 못했던 날.
힘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날.
멘탈이 나가서 좋아하던 모든 걸 잃었던 날.
나는 이 모든 날들을 버티며 여기까지 왔다. 다행히 내가 나를 잃었던 그 순간에는 내 가족과 친구들이 나를 챙겨줬다. 그렇게 나를 다시 찾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세상이 돌아가는 사이클에 다시 올라탔다.
현재의 나는 나를 가장 아낀다. 무엇을 하든 먼저 나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게 원래 내 모습인걸 알았지만, 한 번 초토화된 세상을 쌓아 올리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내 세상을 구축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중에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내 소중한 사람들이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기를 바랬던거다. 정말로 더 이상 그 누구도 아파하지 않게 할테다. 그러자 분노가 가라앉고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나로 변했다. 이제 법원으로 출격할 날만을 기다리며 무뎠던 칼을 날이 서도록 갈고 있다.
인생에는 정답은 없다.
살면서 이 말을 한 번은 들어봤을 테다. 나도 이 말을 여러 번 듣긴 했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들었기에 삶에서 이를 적용하려고 노력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명언 관련 영상에서 같은 말이지만 다른 표현을 보았다.
인생에서 항상 정답을 말하려 하지 마.
'우리는 살면서 가장 긴장하고 심기가 바짝 슬 때가 언제일까?'
라고 한다면, 단연코 '시험'을 보기 전이나 바로 당일이라 생각한다. 시험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학창 시절 학교에서 보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있다. 국가에서 보는 자격증 시험도 그 시험에 속한다. 또는, 취업 때 무조건 한 번 이상은 경험하는 면접도 있다.
우리는 이런 시험을 볼 상황이 생기면 긴장을 한다. 긴장을 하게 되면 몸에 힘이 들어가거나, 준비했던 모든 게 갑자기 백지처럼 되거나, 몸이 뒤틀려 화장실을 수도 없이 가게 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다. 그 이유는 바로 정답을 맞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있어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했던 그날. 나는 정답만을 말하려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답과는 거리가 먼 말만 했고, 그 결과 나는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을 많이 했더랬다.
그 뒤, 인생에서 항상 정답을 말하려 하지 말라는 문구를 보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틀려도 된다. 시험은 다시 치를 수 있으면 재응시를 하면 된다. 이미 지나간 것은 이미 끝난 거다. 물론 더 잘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시간을 돌릴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 오늘부터라도 정답을 맞히기 위한, 정답을 말하기 위한 삶을 놓아주자. 인생에서 한 두 번 오답을 말해도 안 죽는다. 그리고 누가 그걸 오답이라 얘기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오답조차 정답으로 바뀔 수 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어른은 정말 어렵다. 무수히 많은 책임을 견뎌야 한다.
하지만 해낼 수 있다는 각오만 있으면 또 해낸다.
내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자 한다면 불가능이란 없다.
내 삶에 절대 오답은 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