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일상은 계절과 사투를 벌이는 일이었다. 여름의 뙤약볕과 겨울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네 딸과 늙은 아버지를 부양해야 했던 아빠의 어깨는 단 하루도 가벼울 날이 없었다. 그 지독한 고단함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오직 독한 술뿐이었다. 술기운이 오르면 아빠는 어김없이 나를 불렀다. '큰애 네가 잘해야 한다.' 귀에 피가 나고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되던 그 말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날카로운 가시였다. 동생들과 다투기라도 하는 날엔 자초지종도 없이 화살은 나에게만 향했다. 모든 책임은 큰 사람에게 있다는 아빠의 논리는 그 시절 나에게 하나의 지옥이었다. 당최 얼마나 더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하는 건지 책임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는 건지. 철없이 우는 막내와 지들 세상에 빠져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둘째, 셋째 동생이 사무치게 미웠다. 나도 아직 엄마가 보고 싶은 아이인데, 세상은 나에게 자꾸만 어른이 되라고 밀어붙이고 있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무게가 어린 장녀의 발등 위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집안에서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사라졌다. 그 작은 동전 한 잎보다 나를 더 공포스럽게 했던 건 내 등에 쏟아질 후폭풍이었다. 범인을 찾아내라는 아빠의 호령 앞에 동생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도 안 가져갔어요. 우리는 몰라요.'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돌아온 건 연대책임이라는 가혹한 벌이었다. 욕실 앞, 우리 네 자매는 양동이에 가득 담긴 물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무릎을 꿇었다. 찰랑거리는 물의 무게는 아빠가 평소 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하던 '장녀의 책임' 그 자체였다. 아이의 가느다란 팔이 무슨 힘이 있었을까. 서러움과 통증이 정점에 달했을 때, 균형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쾅! 양동이가 바닥에 메쳐지며 거실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아수라장이 된 집안 꼴을 보며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엄했던 아빠의 얼굴에도 묘한 허탈함과 웃음이 번졌다. 지옥 같던 책임감도, 사라진 500원에 대한 공포도 그날의 물줄기를 타고 시원하게 씻겨 내려갔다. 그 500원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영원히 미궁 속으로 남았다. 아빠의 주머니 틈으로 빠졌는지, 아니면 장난기 많은 도깨비가 물 양동이 소동을 보고 슬쩍 되돌려 놓았는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동전 한 잎보다 훨씬 귀한 치킨 두 마리가 그날 밤 우리 집 식탁 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종이봉투 밖으로 새어 나오던 고소한 기름 냄새가 물바다가 되었던 거실을 가득 채웠다. 아빠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치킨 다리를 떼어 우리에게 건넸다. 닭다리 하나를 손에 쥐고 서로의 젖은 머리카락을 보며 낄낄거리는 사이, 지옥 같던 서러움은 개눈 감추듯 사라졌다. 우리의 일상도 그렇게 개눈 감추듯 흘러갔다. 누군가 죽고, 누군가 미워하고, 또 누군가 눈물 나게 억울해하다가도 치킨 한 마리에 다시 살을 맞대고 지지고 볶는 것. 그것이 엄마 없는 하늘 아래 네 자매와 두 남자가 살아가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