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소풍날 아침이면 우리 집 주방은 할아버지의 거친 숨소리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로 가득 찼다. 손녀의 도시락을 책임져야 했던 할아버지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칼을 들고 도마 앞에 앉으셨다. 투박하고 마디 굵은 손으로 말아낸 김밥은 옆구리가 터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삐져나온 밥알 사이로 꾹꾹 눌러 담긴 것은, 엄마 없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게 하려는 한 남자의 정성이었다.
어린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학교에 오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엄마들의 화사한 옷차림 사이로 흙먼지 묻은 점퍼를 입고 나타난 할아버지가 싫어 괜한 심통을 부리곤 했다. "할아버지는 왜 왔어!"라며 쏘아붙이는 철없는 손녀의 말에도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셨다. 그러고는 읍내 장터에서 가장 공들여 고른 예쁜 치마와 장난감을 내 손에 쥐여 주고는, 늘 먼발치에서 소리 없이 나를 지켜보셨다. 부모님과 맞잡고 달리는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할아버지는 행여 내가 고개를 떨굴까 조심스레 내 작은 손을 잡으셨다. 굳은살이 박인 그 손은 그날따라 뜨거웠다.
엄마가 떠난 후, 나와 동생들의 밤은 늘 할아버지의 곁에서 시작되었다. 할아버지는 자장가 대신 해묵은 도깨비 이야기를 꺼내놓으셨다. 젊은 시절 당신이 도깨비와 내기를 해서 이긴 대가로 지금의 이 집을 얻었다는,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허무맹랑한 전설 같은 이야기. 하지만 불 꺼진 방 안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세상의 어떤 괴물도 우리 집 문턱만큼은 절대 넘지 못할 것 같은 기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이야기 끝에 늘 "걱정 마라, 할아버지가 다 이겨놨다"며 투박한 손으로 우리들의 등을 토닥이셨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낮고 아늑한 요람이었다. 그 음성에 기대어 잠이 들면, 낮 동안 돋아났던 가시 돋친 살쾡이 같은 마음도 어느새 스르르 녹아내렸다. 비가 오면 커다란 우산을 들고 교문 앞을 지키고, 누군가와 싸우고 온 날이면 든든한 빽이 되어 학교로 달려오던 나의 할아버지.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할아버지는 단순히 옛이야기 속 도깨비를 이긴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엄마 없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겁먹은 어린 손녀들을 지키기 위해, 매일매일 당신의 생을 걸고 고독한 내기를 이어가고 계셨던 것이다. 그 내기의 판돈은 할아버지의 청춘이었고, 그 대가는 우리들의 평온한 잠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