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50원짜리 사랑

by 꿀밤이

여섯 식구의 생계를 홀로 짊어진 아빠의 무거운 어깨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으셨던 걸까. 할아버지는 해마다 봄바람이 불어오면 약속이라도 한 듯 채마밭을 일구기 시작하셨다. 밭으로 향하는 날이면 나는 당연한 듯 할아버지의 낡은 빨간색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탔다. 할아버지가 힘껏 페달을 밟으면, 낮은 보폭에 맞춰 세상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굽은 등 너머로 불어오던 봄바람은 참으로 묘한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퀴퀴한 퇴비 냄새와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 향기. 그 길을 따라 둑방길을 20분 정도 달리는 시간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여행이었다. 할아버지의 넓고 딱딱한 등에 이마를 기대면 온몸이 포근하게 감싸이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의 품이 어떤 느낌인지 미처 배우지 못했던 내게, 할아버지의 등은 세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온기이자 안식처였다.

밭에 도착하면 나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말동무이자 꼬마 일꾼이 되어 함께 흙을 만졌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여린 고추 모종을 조심스레 나르고, 구멍 난 땅에 심고, 시원한 물을 뿌려주던 시간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날을 세우던 살쾡이 같던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렸다. 밭 위에서 나는 그저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어린 손녀일 뿐이었다.

한참을 흙바닥에서 구르다 보면 어김없이 배꼽시계가 울렸다. 꼬르륵 소리를 용케 알아채신 할아버지는 흙 묻은 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눈깔사탕 하나를 건네주셨다. 입안 가득 퍼지는 인공적인 달콤함이 어찌나 좋았던지, 그 행복감을 동력 삼아 다시 고추 모종을 날랐다.

하지만 평화로운 주말만 되면 조용하던 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온 집안 식구가 일손을 돕겠다고 출동했지만, 동생들은 돕기는커녕 개울가에서 물장난을 치다 밭으로 뛰어올라와 온통 엉망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그러면 할아버지의 호랑이 같은 호령과 함께 그 유명한 '10원짜리 꿀밤'이 날아왔다.

"아이고, 아파라!"

정수리에 맺히는 통증은 매서웠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다. 할아버지의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날에는 단가가 훌쩍 올라 '50원짜리 꿀밤'이 되기도 했는데, 그 매운 손맛에 펑펑 울다 지쳐 할아버지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곤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한참을 울다 깨어난 다음 날 아침이면, 마음속 응어리가 다 씻겨 내려간 듯 묘하게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매운 손맛은 단순히 아픈 벌이 아니라, 어린 손녀의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아주던 투박한 처방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지금, 마음이 잔뜩 헝클어진 날이면 어김없이 그때가 생각난다. 나를 번쩍 들어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주던 할아버지의 굽은 등과, 따끔했던 그 '50원짜리 꿀밤'의 맛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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