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들의 등교 전쟁이 끝나고 나면, 할아버지는 비로소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으셨다.동네 친구들을 불러 앉혀놓고 보글보글 끓여낸 두부찌개를 가득 담아낸 양은 냄비. 그 소박한 안주에 나누는 막걸리 한 잔과 소소한 담소는, 환갑이 넘은 사내가 모진 삶을 버텨내는 유일한 낙이자 비상구였다.
노란 양은 주전자가 바닥을 보일 때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김없이 할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이 시작됐다. 고사리손에 들린 주전자는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뒤뚱거리는 걸음마다 막걸리는 찰랑거리며 길바닥에 절반은 쏟아지기 일쑤였다.
문득 길가에 주저앉아 주전자 부리에 조심스레 입을 대보았다. 뽀얀 국물에서 풍기는 시큼한 향기. 한 모금 머금어본 막걸리는 세상에나, 달면서도 썼다. 반이나 비어버린 주전자를 건네받은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 했다. 곧이어 정수리 위로 매운 '10원짜리 꿀밤'이 날아왔다.
나는 억울했다. 길바닥에 쏟아버린 막걸리보다 내 고사리손에 들린 주전자가 훨씬 무거웠노라고, 눈을 크게 치켜뜨며 꼬박꼬박 말대꾸를 했다. 그 당돌한 기세에 할아버지 친구들이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거 녀석, 기개가 대단하네. 나중에 뭐가 돼도 크게 되겠다!"
그 호탕한 웃음소리가 마당의 적막을 깨웠다. 엄마 없는 집 아이라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할아버지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잠시나마 덮어주던 오후였다. 엄마 없는 집안을 홀로 지키는 할아버지의 고단함이 이런 맛이었을까. 철없는 아홉 살 소녀는 길 위에서 인생의 달고 쓴맛을 먼저 배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