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덕순은 이 동네에서 사십 년 넘게 살고 있다. 자식인 이미란이 28살이니까 자식을 알고 지낸 시간보다 동네를 알고 지낸 시간이 더 오래됐다. 동네에 머문 시간만큼 자연스럽게 이웃이 생겼으며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 늘어났다.
박덕순에게는 유일하게 밭 가꾸는 취미가 있다. 박덕순에게 밭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농작물을 키우는 곳이 아닌 잠깐 환기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치 수전의 19호실 같은 공간이었다. 어린 이미란에게 밭은 촉감놀이와 수확이라는 성취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흙놀이에 흥미를 잃은 이미란은 자연스럽게 발길을 끊었고 밭은 오로지 박덕순의 공간이 되었다.
박덕순의 밭에서는 제철 농작물이 무럭무럭 자랐고 수확한 작물들을 먹고 이미란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5월 중순 마늘종을 제거하고 6월에 수확한 마늘. 박덕순은 마늘을 수확할 땐 뽑은 후 일렬로 세워 놓는다. 박덕순의 성격 때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한 단으로 묶을 때 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라고 한다. 이미란은 아유 저 정리병 또 도졌네라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박덕순의 지혜는 따라갈 수가 없다. 아직 조상이 되지도 않았는데 박덕순의 머릿속에는 익히 말로만 들어온 조상들의 지혜로 가득하다.
양파는 보통 5월 말에서 6월 초에 수확하지만 날짜로 결정하기보단 양파의 상태를 보고 캐는 시기를 정해야 한다. 올해는 양파의 줄기가 일찍 쓰러져 5월 중순에 캤다. 햇양파는 그냥 먹어도 될 정도로 단 맛을 내지만 캐놓고 한 달 지난 지금은 잔뜩 약이 올라 매운 내를 풍긴다. 양파 보관법은 각자만의 노하우가 있겠지만 박덕순은 펼쳐두거나 망에 넣어 바람이 많이 드는 곳에 보관한다. 저것도 삶의 지혜일까.
오늘 아침 박덕순은 아는 할아버지 집에 있는 매실을 따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등본 상 가족 구성원이 두 명 밖에 안 되는 단출한 가구지만 출가한 자식들과 손자를 먹이기 위해 매실을 한가득 딸 요량인지 어제저녁 미리 아들에게 전화하여 매실을 따놓을 테니 아침에 전화하면 데리러 오라는 계획까지 세워뒀다.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난 이미란은 매실을 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매실인지 자두인지 헷갈릴 정도로 큰 매실은 한 손 가득 들어왔고 그 양은 김장할 때 쓰는 바구니 2개에 가득 들어있었다. 이미 세척과 건조과정을 거친 매실들은 박덕순 손에 들려 꼭지가 따지고 있었다. 저 많은 매실들로 무엇을 할지 감도 오지 않는 이미란은 박덕순에게 물었다.
'아니, 그걸 얻다 쓸려고 그렇게 많이 땄어? 누가 먹는다고'
'놔두면 다 먹어. 매실액도 담그고 매실장아찌도 담그고 매실 김치도 담그고...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거야'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박덕순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매실의 흔적을 치워나갔다. 꼭지를 전부 딴 매실을 하나하나 닦아 설탕과 1:1 비율로 무려 25L 통에 담았고, 식감이 있는 정도의 크기로 썰어 각종 소스들로 버무려 김치를 담갔으며 매실장아찌를 만들기 위해 모자란 설탕을 구매하기 위해 마트에 갔다.
박덕순의 하루는 이미란의 하루보다 짧다. 박덕순과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이미란은 박덕순이 쉬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다. 항상 분주하며 어디선가 뭘 하고 있다. 이미란은 박덕순에게 제발 주말엔 누워서 낮잠도 자고 좀 쉬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박덕순은 개의치 않고 새벽부터 밭에 가기 위해 나갈 채비를 한다. 박덕순의 하루는 오늘도 분주하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