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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모양 Feb 14. 2019

철든 아이

동생에게 철 좀 들어라는 구박을 못하게 되어 슬픈 누나의 이야기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내 휴대폰 액세서리에는 ‘Fe 좀 들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나보다 열한 살 많은 사촌언니가 나에게 생일선물로 준 핸드폰줄이었다. ’Fe’라는 원소기호가 그려진 작은 핸드폰줄. 알파벳도 잘 몰랐던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글씨였기 때문에, 언니에게 “언니. 이게 무슨 말이야?”라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 대학생이었던 언니는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응. 나중에 화학 시간에 배울 텐데 여기 쓰여있는 Fe가 원소기호로 ‘철’이야. 그러니까 ‘철 좀 들어’라고 써 놓은 거야. 그리고, 이 안에 들어있는 이 클립이 철이야. 재밌지?”

언니의 설명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이해하는 척했다. 원소기호가 뭔지도 원소가 뭔지도 화학이 뭔지도 몰랐지만 끄덕이며 고맙다고 했다. 어려워 보여 마음에 들었다. 고상하고 멋있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별 것 아닌데, 당시 나이 12살이었던 나에겐 엄청난 깨달음 후에야 이해할 수 있는 암호 같았다. 사촌 언니 오빠들이 하는 건 모든 게 멋져 보였고, 따라 하고 싶었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어른들의 세상을 시샘하던 철없는 아이의 마음에 꼭 들었다.




며칠 전, 동생을 보다가 갑자기 그때 그 액세서리가 생각났다. 막내 녀석이 진짜 철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30년을 살며 ‘이 녀석 봐라. 철들었네.’하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동생이 엄마 아빠 생각을 자기 생각보다 먼저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엄마 마음을 살피고, 엄마를 다독이며 타이르고, 아빠와 함께 집안 사정을 생각했다. 철들어라 철들어라 말하던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로 녀석은 제법 성숙해져 있었다. 만날 때면 종종 동생에게 “언제 철들래?”하며 잔소리를 투척했는데, 그날은 차마 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기특하게 생각해야 할 일인데 쓴 미소가 지어졌다. 부모님과 진중하게 가계를 걱정하고 있는 동생.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짠했다.

‘너도 나도 철이 들어버렸구나.’

철이 드는 것은 주기율표보다도 더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을 알게 되는 것인데. 이제는 그게 멋지고 기분 좋은 일이 아니란 걸 아는데. 어느새 내가 어른이다. 동생마저도 어른이다. 어린 시절엔 몰랐던 것을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다. 조금 더 오래 몰랐으면 좋았을 세상의 이면이 보이고, 철근처럼 무거운 부담감과 책임감의 무게를 느낀다. 흑흑.


한때는 마냥 어른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사무치게 알겠다. 어른스러움을 요구받는 진짜 어른이 되는 게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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