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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모양 Mar 09. 2019

샤워기 수압은 삶의 질과 정비례한다고요

"수압이 세서 좋았어요."

첫 해외출장을 갔을 때, 숙소가 괜찮았는지 묻는 팀장님께 내가 내놓은 대답이다. 팀장님은 이 대답이 재밌다며 껄껄 웃으셨다. 당시 내 나이는 26살이었으니까. 젊은 친구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 '수압'이란 표현이 의외라 생각하셨는지 이후에도 팀장님은 종종 그때 에피소드를 꺼냈는데, 그럴 때면 "역시 독특해"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더하셨다. 난 뭔가 나의 은밀한 가치관이 들킨 것 같아 민망했지만, 그저 베스스 웃었다. "그 숙소는 정말 수압을 잊지 못하겠는 좋은 숙소였어요." 하면서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가치 기준에는 변함이 없다. 솔직하게 인정한다. 샤워기 수압은 내 삶의 질과 정비례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냐 묻는다면 난 이 세 가지를 뽑을 거다. 샤워기. 수건. 드라이기. 나는 이 것들이 함께하는 생활이 보장된다면 어디를 가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먼지 뒤덮인 하루를 보내고 와서 샤워까지 망치면 기분이 배로 망가지지 않는가? 수압이 약한 샤워기로 샤워를 해 본 경험자는 안다. 물을 질질 흘리는 샤워기로 샤워를 하는 건 결핍의 감정을 온몸 가득 느낄 수 있는 답답한 일임을. 그런 매가리 없는 물방울에 머리를 감아보면 누구라도 세차게 두드리는 물줄기를 그리워하게 되고 만다. 수건도 마찬가지다. 덜 마른 수건을 사용해 본 사람은 마른 수건의 소중함을 안다. 닦아도 닦아도 개운하지 않은 젖은 수건의 기운. 큼큼한 냄새가 날 것 같은 그 여운은 정말 별로다. 시원찮은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는 건 또 어떤가. 콜록이는 드라이기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다 보면 내 숨소리에도 같이 기운이 빠지고 만다. 이런 샤워는 꽝이다. 하루를 꽝으로 마무리하면 그 찝찝함이 꽤 오래간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다르다. 감탄스러운 샤워기 물줄기, 뽀송한 수건, 성능 좋은 드라이기의 삼박자를 두루 갖춘 샤워를 마치고 나면 하루를 그럴듯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 상쾌하니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30분 만에. 그러니 우리는 감동적인 수압을 만났을 때 감사해야 한다. 샤워기 수압을 운운하는 젊은이로서 확고히 말하는데, 정말 완벽한 샤워가 내어주는 기분은 소고기나 삼겹살과 견줄 수 없는 차원의 행복이다.


오늘도 나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 욕실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을 끼 얻은 다음 퐁글퐁글한 거품을 만들어냈다. 출장 가서 묵었던 호텔만큼 감동적인 물줄기는 아니었지만 꽃향기가 숭숭 올라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봄내음을 닮은 바디워시와 샴푸. 그 향기를 남기고 먼지는 깨끗이 씻어냈다. 쏴악. 불필요한 비누 거품을 모조리 흘려보내니 통쾌했다. 그렇게 말끔해진 다음엔 포송포송한 수건으로 젖은 물기를 닦아냈다. 상쾌한 리듬을 망쳐선 안되기에 가장 보드라운 수건을 골라 들고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드라이기를 꺼내 최고 단계인 3단계 세기의 뜨거운 바람을 틀었다. 한 톨의 물분자도 남기지 않고 증발시켜버릴 법한 강력한 바람이 나왔다. 음 역시 만족스럽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슥삭 말렸다. 그렇게 드라이까지 마무리하니 만신창이 같았던 정신이 온전해졌다. 코코넛 향이 나는 바디로션까지 바르니 세상이 달콤해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실로 훌륭한 샤워였다. ‘캬 이게 행복이지~’


금요일 밤 11시 38분. 나는 방금 소울까지 개운해지는 완벽한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 한 껏 뽀송뽀송해진 기분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마무리 지음과 동시에 침대에 누워 잠에 들 참이다. 알람을 맞추지 않은 채 포근하게 누울 거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제멋대로 일어날 거다. 늦잠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 좋다. 아- 행복하다.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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