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모양 Mar 21. 2019

뛰지 맙시다

지하철 계단에서 만난 가르침

이럴 수가. 너무 빨리 도착했다.

시간 계산을 잘 못 했다. 아니 계산을 참 정확하게 했지만 더 일찍 서두른 게 문제였다. 파주에서 성수는 꽤 거리가 머니까.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넉넉하게 출발해야지 생각하며 20분이나 일찍 나섰다. 그 탓에 나는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성수역에 도착했다.


너무 일찍 도착하겠는데 어쩌지. 별 수 없다. 이미 지하철역에 도착해버렸으니 약속 장소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가야겠다. 20분이나 먼저 가서 심심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이런저런 혼잣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보폭을 줄였다.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계단이 있었다. 아 맞다 성수역엔 계단이 있었지. 느긋느긋 여유 부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계단 앞에 놓인 간판이 하나 보였다. 숱하게 오갔던 지하철 출구인데 그날따라 검고 굵은 글씨로 적힌 안내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설치된 사인. 큼지막한 글씨. 한 개씩 띄엄띄엄 달아놓은 글자가 어딘가 촌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묘하게 정이 갔다.

‘아! 뭔가 마음에 들어. 사진을 찍자.’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때는 왜 끌리는지 몰랐다. 그냥. 나중에 생각날 것 같아서.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지만 글자 모양이 독특한 영감을 주는 것 같아서.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마음에 들어서. 찰칵 기록을 남겼다.


오늘 아침. 출근 지하철을 타는데 그 사인에 적힌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곧 출발할 것 같은 지하철에 타기 위해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내려오던 찰나였다. 간신히라도 세이브하고 싶어 전력 질주하는 야구선수처럼, 3호선 3-5번 출입문만 보면서, 곧 닫혀버릴 것 같은 문을 향해서 내달리는데, 신경 쓰이게도 ‘뛰지 맙시다’라고 적혀있던 성수역 사인이 번뜩 떠올랐다. 뛰어가던 나는 ‘그래 뛰지 말아야지’하며 속도를 늦췄다.


그렇게 계단을 다 내려오니 지하철 문이 닫혔다. 열차를 하나 떠나보내고 다음 열차를 탔다. 빈자리를 찾아 출입구 바로 옆 자리에 앉은 나는 방금 생각난 간판 사진을 찾아봤다.


자세히 보니 이 간판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이 문장은 보통의 경고문구랑 달랐다.

뛰지 맙시다

뛰지 마세요라고 쓸 수도 있었을 텐데 뛰지 맙시다라니. ‘안된다’도 아니고 ‘뛰지 맙시다’라니. 아마도 이 간판을 만든 분은 범상치 않게 젠틀한 사람일 거야. 금지하는 말이 아닌 설득하는 것 같은 묘한 문장이잖아. ‘네가 바쁜 건 알겠는데. 뛰고 싶은 그 마음도 잘 이해하는데. 그래도 뛰지는 맙시다.’이렇게 말하는 것 같잖아.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지 마세요.”라는 말속에는 듣는 이가 없고 말하는 이만 들어있어서 싫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하지 맙시다.”라고 하면 먼저 솔선수범을 보이는 것 같아 보기 좋다. 마음에 든다. 강요하고 명령하는 "하지 마"어조 안에는 꼰대스러운 면이 녹아있으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하려던 것도 하기 싫어지고 마땅히 들어야 할 의견도 잔소리로 느껴지니까. '뛰지 맙시다'라는 문장을 쓴 사람을 닮고 싶다. 하려던 것도 하기 싫게 만드는 명령 ‘하세요’보다는,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기꺼이 따라 하게끔 만드는 문장 ‘합시다’의 인성이 되고 싶다. 종잇장같이 미묘한 그 차이를 몸에 지닌 사람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샤워기 수압은 삶의 질과 정비례한다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