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여행기 #1. 출발
남미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함께 가는 A와 C를 공항에서 만났다. 모두가 각자의 짐을 양 어깨와 한쪽 손에 가득 들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우리는 챙겨 온 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실내화도 챙겼고, 혹시 몰라서 경량 패딩이랑 목베개도 챙겼어요.”
A의 말을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미쳐 챙겨 오지 못한 물건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서 짐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준비한 분량의 짐만 싣고 비행기에 올랐다.
현지에 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짐 가방이 좀 부실하더라도 내가 챙겨가는 음악이 여행을 더 넉넉하게 만들어 줄 거야.’
자리에 앉고 조금 후에 비행기가 이륙했다. 활주로를 벗어나니 지구 반대편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두렵기도 설레기도 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준비해온 노래를 재생했다. 두고 온 패딩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여객기와 함께 붕 떠버린 비행시간 동안 내게 필요한 건 경량 패딩도 목베개도 아닌 이어폰이었으니.
'역시 노래를 챙겨 오길 잘했군'
묵직하고 잔잔한 김동률의 목소리를 들으며 창 밖을 보니 우린 이미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조그만 비행기 창을 통해 조각구름이 보였다.
문득, 10년 전 이맘때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단기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비행기에 올랐던 그때도 딱 이런 계절이었다. 어렸던 나는 어른이 되면 진로 고민이 끝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서둘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대학을 가고 전공이 정해지면 모든 것이 뚜렷해질 거라 생각했다. 더 이상의 진로 고민은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상은 왜 그리 복잡한지, 어른이 되어갈수록 나의 진로 고민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꿈을 안고 대학 생활을 시작하던 새내기 소녀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진학하고 빠르게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바라던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진로 문제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숙제로 내 앞에 놓여있다. 나는 여전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이제 나는 안다. 진로 고민이 어른이 된다고 해서 끝나고 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는 가사가 마치 현재의 내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는 출발의 순간,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는 길을 만나도, 발걸음 닿는 대로 천천히 출발하겠다고. 얼마나 더 먼 곳을 갈 수 있을까 기대하며 그렇게 가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