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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모양 Mar 23. 2021

고맙다 쿠바! 이렇게 남아있어 줘서

남미 여행기 #2. 천천히 느리게 걷자

쿠바의 첫 숙소는 예상한 것보다 더 열악했다.


숙소의 수도와 냉장고, 가스레인지는 작동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오래된 것들이었다. 청결도가 의심스러운 소파는 찝찝한 냄새가 나는 오래된 천으로 덮여 있었고, 침대의 매트리스는 스프링이 다 망가져 포근함보단 뻐근함에 가까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열악한 시설과 마주하고 나니, 기대했던 소개팅 상대를 실물로 마주했을 때에 받았던 실망감 같은 감정이 밀려왔다. 들떠 있던 마음이 살짝 수그러들었다.

‘여기가 사람들이 극찬하는 쿠바가 맞나?’

그때까지는 도대체 사람들이 이 나라를 왜 여행하겠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시작된 여행이니까, 일단 자고 일어나서 기운을 내야지.’

그렇게 나는 살짝 축소된 기대감을 안고 삐걱대는 침대에 피곤한 몸을 뉘었다


다음날 아침. 중남미의 태양은 강렬한 빛깔과 뜨거운 열기로 마을을 깨웠다.


시차 적응을 완벽하게 못한 탓인지 들뜬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예상한 시간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오래간만에 되찾은 할 일 없는 아침이었다. 나는 한가롭게 테라스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아침 햇살 한가운데 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지난밤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건너편 건물 옥상에선 한 아주머니가 빨래를 널고 있었고, 주변 건물에는 집집마다 널어놓은 빨래가 펄럭이고 있었다. 거리에는 가벼운 차림의 사람들이 자전거와 인력거를 끌고 나와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빵을 파는 배달부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고 문 밖으로 나와 빵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소박하지만 정겨운 쿠바의 아침 풍경. 꽉 막힌 출근길로 기억되는 서울에서의 아침과 사뭇 달랐다. 사람들은 느리지만 넉넉해 보이는 형태로 그렇게 각자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기하의 노래 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느리게 걷자.


전혀 다른 속도의 시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쿠바 사람들. 일어나자마자 바쁘게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나의 아침은 늘 분주했지만,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 와서 만난 아침은 한가하기만 했다. 한국에서의 시간은 최첨단을 달리느라 늘 바쁘게 돌아갔지만, 그들의 시간에는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여유가 묻어났다. 조급해하거나 서두르지 않는 그들만의 시간. 나는 분주하게 돌아가던 나의 시계를 잠시 멈추고 여유 있는 쿠바의 속도에 나를 맞추었다. 이 곳에서 만큼은 ‘빨리빨리’를 외치지 말고 느리게 살아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작정하고 나니, 불쾌하게 보이던 숙소의 낡은 시설들도 어딘지 모르게 정감 있게 느껴졌다. 쿠바가 좋아졌다.


비록 침대는 낡았을지라도, 건물이 화려하지 않더라도, 쿠바의 여유로움은 마음을 뺏길 만한 것이었다. 햇볕 내리쬐는 테라스에 앉아 구름을 보며 웃을 수 있고, 빨랫줄에 빨래를 널어 두고 해와 바람이 건조하여줄 때까지 기다려도 되는 곳. 멈추어 있기 때문에 더 매력적인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왜 쿠바를 여유와 낭만이 있는 낙원이라고 표현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고맙다 쿠바. 오래되고 낡았지만 여유 있는 옛날 모습을 간직한 채 이렇게 남아있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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