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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모양 Mar 24. 2021

세상이 편리해진 만큼 내 일상이 편안해진 게 맞을까?

남미 여행기 #5. 의심병

아바나의 신시가지(베다도 지역)를 둘러보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려 할 때, A가 말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ATM에서 현금 인출해서 가야 해요.”


현금도 미리 준비해서 갔지만, 여정이 길고 이동시간이 많다 보니 여행경비를 모두 현금으로 가져가기엔 위험했다. 그래서, 우리는 중간중간에 현지 통화로 현금인출을 하기로 하고 해외인출이 가능한 카드를 각자 준비해서 왔다. 그날이 준비해둔 그 비장의 카드를 사용해야 하는 첫날이었다. 신시가지를 벗어나면 은행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숙소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ATM이 있는 은행으로 향했다.


“제가 인출할게요. 잠시 기다려주세요.”


돈 관리를 담당한 A가 은행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A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상하다. 인출이 안되네요.”

“어라? 안돼요? 그럼 제 카드로 해볼게요.”


카드를 바꿔서 내가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나도 별 소득 없이 돌아왔다.


“저도 인출이 안 되네요..”


ATM은 나에게도 똑같은 오류 화면을 띄웠다.


우리 셋은 갑작스러운 위기상황에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우리는 뙤약볕을 살짝 피해 서서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왜 안 되는 걸까요?”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인출을 못하면 경비가 부족할까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인출을 못 하는 경우의 수는 생각하기 싫었다. 남은 일정을 소화하려면 여비가 필요했기에, 어떻게든 인출을 해야 했다.


“혹시 저기 제시된 금액이 아닌 더 큰 금액을 우리가 입력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제가 가서 금액 낮춰서 시도해볼게요.”


나는 다시 ATM 앞으로 다가가 차분하게 내 비밀번호와 출금 금액을 입력했다. 욕심내지 않고 ATM 기계가 처리해주는 최대 금액에 맞춰 인출하기 버튼을 눌렀다.


‘제발~제발~’


속으로 인출 성공을 기원하며 ATM 화면을 응시했다.


‘SUCCESS!’


다행히 인출 성공 메시지가 나타났다. 돈 세는 소리가 들리니 날아갈 듯 기뻤다. 나는 일행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어서 전해야겠단 생각으로 돈과 지갑을 챙겨 은행을 나섰다.


그때, 평소 울리는 일 없던 내 휴대폰이 울렸다.

'브으으- 브으으-'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였다. 의심이 많고 겁이 많은 나는 해외에 있을 땐 절대로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의도치 않게 로밍 요금을 뒤집어쓸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그 철칙에 따라 그날도 빠르게 수신 거부를 했다. 그리고 A와 C에게 가서 현금 인출에 성공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A도 나와 같은 방법으로 일부 금액을 찾았다. 역시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A가 현금을 인출에 성공하자, 이번에는 A의 휴대폰이 울렸다.

'브으으- 브으으-'

A는 나와 달랐다. 모르는 번호이지만 걸려온 전화를 일단 받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차분하게 통화를 이어갔다. 빠르게 끊어버릴 줄 알았는데 꽤나 중요한 전화 같았다.


"무슨 전화예요?"


전화를 마친 A에게 물어보니 카드사에서 방금 발생한 해외 인출 건이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걸어온 전화라고 했다. 순간, 무심코 끊어버린 조금 전의 전화가 생각났다. 그렇다. 내게 왔던 전화도 카드사의 전화였다.


뒤늦게 그 전화가 매우 중요한 전화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걸려왔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쿠바 같은 위험국가에서 인출을 하면 카드사에서 바로 전화가 온다. 그리고, 그 전화에 응답이 없으면 카드는 바로 보호조치에 들어가서 인출이 제한된다. 나는 아무 응답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내 카드는 보호조치에 들어갔다.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ATM에 내 카드를 넣고 인출을 다시 시도해보았지만 기계는 ‘왜 그렇게 의심이 많니?’라고 놀리듯이 야속하게 내 카드를 내뱉었다.


카드를 되돌릴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분명 쿠바 회폐를 내어주던 상냥한 카드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자 내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되었다. 일단은 급한 대로 쿠바에서 쓸 돈은 인출했지만 당장보다 앞으로가 문제였다.


“계속 카드를 못 쓰면 저는 어떻게 하죠?”

“괜찮아요. 우리가 있잖아요. 일단 숙소 가서 쉬면서 연락 오길 기다려보아요.”


어른스러운 C와 A가 내 걱정을 덜어주었다. 막막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혼자가 아니란 사실에 조금 안도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다행히 두어 시간 후에 한국에 있는 카드사에서 다시 전화가 왔고, 전화를 통해 상황을 설명한 후 내 카드는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한바탕 마음고생을 한 이후라 그런지 배가 고팠다. 우리는 아바나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그때 길가에 공중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공중전화. 쿠바 길거리에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물건이지만, 이제 한국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물건이다.


낮에 있었던 ATM 인출 사건을 떠올리며 공중전화를 마주하니 휴대전화가 없던 옛날이 생각났다.

‘옛날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도 일단 받았는데….’


그땐 그랬다. 집 전화로 전화가 오면 누구에게 온 전화인지 몰라도 일단 받았다. 상대방이 ‘누구누구 바꿔주세요.’라고 말하면 친절하게 전화 중계자의 역할도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급한 일이 있을 때면 종종 학교 앞 공중전화기로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었다. 잠시 통화가 연결된 동안 내가 재빠르게 ‘엄마 나야’를 외치면, 엄마는 나를 위해 기꺼이 전화연결을 허락했다. 반면에, 지금의 나는 전화를 받아보기도 전에 수신거부를 누르고 있다. 다른 사람의 휴대폰이 반복해서 울려도 실례가 될까 봐 받지 않고 내버려 둔다.


‘과연 스마트폰이 가져다준 편리함의 크기만큼 내 일상이 편안해진 게 맞을까?’


집 앞 사거리에 있던 공중전화가 한 손안에 쏙 들어가는 스마트폰이 되었다. 이제는 전화를 받기 전부터 발신자를 쉽게 알 수 있고,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영상통화를 걸 수 있다. 혹여 못 받은 전화가 있더라도 부재중 전화 기록이 남아있어 누가 몇 시에 전화를 걸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편리하다. 이전과 비교해보면 참 많은 것이 발전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 더 마음 편히 살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20년 전보다 내가 너무 차가워진 건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불편한 방식으로 살아야 했지만, 더 마음 편한 온도에 살았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믿고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던 그때는 의심병을 안고 사는 지금보다 불안하지 않았으니까. 이만큼 차갑지 않았으니까.


이제는 가끔 울리는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이런 주문을 외우며 전화를 꼭 받는다. 의심병을 버리자. 넉넉해지자. 따뜻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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