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새 학기가 시작됐다. 스무 번째 맞이하는 개학이지만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출근을 서둘러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하려 노력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개학 전날 꼭 교실에 가보곤 했다. 낯선 학생들의 이름을 눈에 익히고, 책상과 의자를 한 번 더 닦고, 사물함과 신발장의 번호는 잘 붙어 있는지 점검한다. 첫날 수업활동을 어떻게 할지 조금 더 다듬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젠 ‘짬밥’을 핑계 삼아 치밀한 준비성은 포기했지만 최소한 개학날 가장 먼저 교실 문을 여는 사람이 교사인 나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낯설고 긴장되는 첫날, 우리 반 학생들 누구도 텅 빈 교실 문을 여는 떨림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 비록 항상 복도에서 눈에 힘주고 '뛰지 마! ’를 외치던 사람이 담임이라는 사실에 얼어붙기는 하겠지만 전깃불도 켜지지 않은 컴컴한 교실에 혼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새 학기 일주일은 한해 학급 분위기를 좌우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교사도 학생도 서로를 탐색하며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러한 수줍은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지만 저학년은 여전히 새로움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교실 입구에서 들어가지 않겠다고 울며 떼쓰는 친구나 집에 가서 ‘힘들어요. 학교 끊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신입생도 종종 등장하곤 한다.
새로운 선생님, 처음 만난 친구들, 접해보지 못한 교과서. 모든 것이 낯선 환경에서 발표 태도, 줄 서기, 모둠 정하기, 사물함과 서랍 정리 등 학급생활에 필요한 약속들을 정하고 익혀야 하니 긴장감 가득한 시기일 수밖에 없다. 학생들도 그렇지만 교사에게도 만만치 않은 시간이다. 몸살을 앓는 사람도 적지 않다. 더욱이 돌출 행동을 보이는 한두 학생이라도 있다면 그 해는 맵디 매운 신(辛) 학기가 되는 것이다.
신학기의 새로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시기도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막바지, 전면 등교가 다시 시작된 재작년 3월이 그랬다. 개학 첫날, 1교시 쉬는 시간이 끝나자 반 학생 3분의 1이 교실에 없었고 그런 상태는 시간이 지나도 별로 나아지지 않아서 틈만 나면 복도로, 운동장으로 이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선생님의 화난 표정 따위를 살피는 친구는 없었다. 하필 내가 맡은 2학년의 상태가 제일 심각해 교실 앞 복도는 개별 상담하는 교사와 학생들로 늘 붐볐고, 같은 학년 선생들의 동지애는 끈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날마다 청양고추를 한 움큼 입에 넣은 것 같은 매운맛 가득한 해였다.
코로나 종식과 함께 학교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하지만 새 학기의 수줍음과 탐색전은 예전에 비해 많이 짧아진 느낌이다. 나 역시 적지 않은 학생 수, 첫날부터 이뤄지는 급식과 정상 수업, 교과서가 바뀔 때마다 늘어나는 학습량 등을 핑계로 새롭게 맞이한 학생들을 하나하나 살피기보다는 주어진 시간 어찌어찌 때우기 바쁘다. 26명 등교해서 26명 교실 문을 나섰다면 괜찮은 하루였다 여기며 살고 있다고나 할까.
“선생님은 당진에서 무슨 초등학교였어요?”
“급식실에서는 일단 밥만 먹고 이야기는 교실에서 합시다.”
개학 이튿날, 맞은편에서 점심을 먹으며 질문했던 친구는 메마른 대꾸에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하루 겪은 선생님에게 말을 걸기까지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까. 마음 약해진 나는 바로 원칙을 깨고 답을 해주었다.
“선생님은 당진에서 초등학교를 나오지 않았어. 그래서 이름을 말해줘도 모를 거예요.”
원칙을 깨는 게 아니었다.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언제부터 있었어요?”
“선생님은 할머니예요, 아줌마예요?”
“내가 봤을 때 아줌마가 맞아.”
옆 친구까지 거들기 시작했다. 다시금 이야기는 교실에서 하자는‘의례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아이고, 양치질까지 야무지게 한 그 친구는 교실에서 질문을 이어가기 위해 성실히 나를 기다렸다.
“선생님 알림장 검사해야 하는데.”
“제 눈 안 보고 알림장 봐도 돼요. 그런데 선생님은….”
누구와 이야기할 때 되도록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자는 이야기를 전한 터였다. 고맙게도 알림장을 보며 대화를 허락해 준 그 친구의 질문은 점심시간 내내 계속됐고, 하다 하다 “선생님은 여자예요, 남자예요?”까지 이어졌다. 그날 저녁, 꽤 진지하게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타고난 생김새 때문일까, 후천적 차림새가 문제였을까.
신학기 3주 차, 이 친구의 관심은 현재진행형이다. 편식이 심해 가끔 실랑이하곤 하는데 내가 즐겨 먹지 않는 반찬이 있으면 “나도 이거 먹을 테니 선생님도 그거 끝까지 드시기예요.” 깜찍한 거래를 제안하고, 교탁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는 날도 계속되고 있다. 이 녀석 덕분에 선생 탐색의 용기를 얻은 친구들과 함께.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아기 새들의 대화 내용 파악은 불가능. 동시다발로 쏟아지는 말에 혼이 나갈 지경이지만 최대한 적절한 타이밍에 “와, 그랬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 등의 추임새를 넣으려 노력한다.
교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못 알아들었다고 느낄 때 아이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하거나 “아니에요.”라며 뒷걸음질 치기, 후자의 경우 아이의 눈엔 실망이 가득하다. 그 친구의 탐색에서 내가 받은 점수는 기준점 이하일 테지.
신(新) 학기, 새로움으로 가득해야 할 시기. 20년 차 교사인 나는 어쩌면 학생들을 알아가는 애정 어린 호기심보다는 무탈한 학급생활에 걸림돌이 될 친구를 추리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무사안일에 젖어 있던 내게 질문을 쏟아내며 반짝이던 아이의 눈이 새삼 마음에 와닿는다.
지금 이 순간, 나에 대해 이렇게 많은 궁금함(심지어 성별까지!)을 가진 사람이 우리 반 학생들 말고 또 누가 있을까. 3월이 지나면 그마저도 옅어질 일이다. 그러니 귀에서 피가 날지언정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최대한 눈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자. 할 수 있는 물음에 마음을 다해 답해보자.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담임 노릇이 점점 쉽지 않다. 눈물 줄줄 흐르는 매운맛 학기가 되기 일쑤다. 낡고 희미해진 마음이 삐져나왔을 텐데 고맙게도 관심과 탐색을 멈추지 않는 우리 반 친구들의 마음에 진심으로 마주하기. 올해 신학기의 매콤함을 줄이는 나만의 비법으로 삼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