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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투덜이 Apr 14. 2024

이 구역의 대장은 나야!

가르침이라 쓰고 자존심 싸움이라 읽는다

 어린 시절 나는 떼쟁이로 유명했다.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굽히는 법이 없었고 그렇게 얻은 건 바로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린 후 다시 사달라고 뒤집어졌다. 꽃 피는 봄, 하필 따지 말라는 봉오리만 똑똑 떼버려 엄마를 기함하게 만드는 건 예사였다. 친척들과 바닷가로 놀러 간 어느 날, 미운 네 살의 만행에 지친 아빠는 결국 ‘맴매’를 경고했다. 죄질(?)이 얼마나 불량했던지 옆에 있던 이모들도 말리기는커녕 “저 계집아이는 맞아야 정신 차려”라며 남들이 못 보도록 둘러쌌단다. 그래도 굴하지 않은 나는 결국 작은 방 유배형에 처해졌다. 공소시효 따위 없는 만행이었다. 반백 살 넘은 지금까지 지청구를 들을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늦깎이 교사 생활을 하다 보니 어린 시절 나 같은 친구를 가끔 만난다. 한 학년도에 여러 명을 만나는 운수 좋은(?) 해도 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뭘 그리 나한테만 엄격한지, 적어도 나는 미취학 아동일 때만 그랬는데.

 손 들어도 자기만 안 시켜준다며 들으란 듯 큰소리치고(직전에 세 번이나 발표했던 건 중요하지 않다), 짝꿍이 책상 넘어왔다고 엎드려 꼼짝 않는다. 이 녀석이 포함된 모둠은 대표 뽑을 때 유난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 자기가 모둠장 될 때까지 가위 바위 보를 무한 반복하기 때문. 불러 내 주의라도 주는 날이면 떠나가라 발소리를 쿵쿵대며 자리로 들어가기 일쑤다. 화났다 이거지.   

   

 올챙이 시절 생각 못 해서일까, 내로남불 개구리라 그런가, 나는 그런 꼴을 유독 못 봐 넘긴다. 득달같이 다시 불러 눈에 힘주고 버릇없는 태도를 경고한다. 그래도 굴하지 않으면 목소리를 높여 즉각적인 태도 수정을 요구한다. 발을 굴러 들어갔다면 사뿐사뿐 다시 걸어가고, 엎드려 있었다면 자세를 바로 해야 끝난다. 입 내밀고 고개 까닥 만으로 답을 대신하는 건 있을 수 없다. 어떻게든 “네.” 소리를 듣고 만다. 전체 친구들에게도 단단히 이른다.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된다고, 속상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표현에는 예의가 필요하니 잊지 말라고. 무례한 태도가 나쁜 습관이 되지 않게 마음에 새기라고.

 반면교사도 필요한 법이지, 귀하게 자란 친구가 좀 많아? 한 번은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어. 저 녀석의 투정을 받아주면 다른 친구들도 따라 했을 거야. 아무렴, 그렇고말고.

 애써 변명해 보지만 나는 안다. 가르침을 빙자한 대결이었음을. 손주 같은 녀석들과 자존심 싸움을 벌였음을. 보라는 듯 도전장을 날렸으니 기꺼이 진검승부에 응해주지. 이 구역의 대장이 누구인지 알려주마.

 “봤지? 선생님에게 도전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조심해!”     


 이쯤에서 나의 초등학생 시절을 다시 돌아보자. 학교에선 자제했지만 성질머리가 어디 가겠는가. 부모님의 꾸중, 특히 아빠의 야단에 말대꾸를 멈추지 않았다. 오죽하면 일곱 살 차이 나는 동생도 ‘언니는 왜 쓸데없이 대들어 한 대 맞을 걸 두 대 맞을까’ 한심했다고 한다. 인정한다, ‘매를 버는’ 스타일이었음을. 내가 아빠였대도 쥐어박고 싶은 아이였다.

 겁도 없이 왜 그랬을까. 까마득한 시절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명령조 말투가 그렇게 싫었던 것 같다. 잘못한 건 맞지만 큰 소리로 야단치니 화가 났다. 아빠가 말하는 열 가지 잘못 중 하나만 사실과 달라도 그 하나에 매달려 부당함을 주장했다.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혼내냐고. 왜 나만 미워하냐고.

 더욱이 아빠의 사과는 공식이 있었다. 두 손 모아 싹싹 빌며 잘못했다고 또박또박 말해야 비로소 끝났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는 반성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 단정 지었다. 아닌데, 내가 잘못한 것 아는데, 긴장하고 겁나서 소리가 안 나오는 건데. 잘 못했다 말하나 봐라. 보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사과보다는 굴복을 요구하는 것 같아 어린 마음에도 모멸감이 들었다. 아빠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고 결국 쥐어 박히거나 문밖으로 쫓겨나야 결투는 일단락됐다.   


  솔직히 어른이 된 지금도 잘못을 말끔히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과거 상대방이 나에게 했던 못지않은 악행(?)들이 떠오르며 괜히 억울하다. 그렇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던 수만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옆에서 거드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더욱 발끈한다. 이런 마음들이 있는 그대로의 잘못을 인정할 용기를 막는다. 

 시간이 필요하다. 상황과 행동을 찬찬히 되짚어볼 시간. 이런 여유를 통해 내 실수를 받아들이고 상대에게 진솔하게 미안한 마음을 전달할 힘이 생긴다.     

 

 나를 스쳐 간 떼쟁이들에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얼마나 주었을까. 문제가 발생하기 무섭게 ‘처리’해버린 순간이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잘못한 친구는 아직 제 감정이 앞서 있으니 인정하기 쉽지 않고 교사인 나는 결론이 중요하고, 결국 목소리 높여 ‘사과하세요’ ‘예의 바르게 말해요’를 요구하는 대결이 돼버린다. 왜 그리 즉결심판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걸까. 돌아서면 항상 후회하면서.


 쉽지 않겠지만 학생들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기회를 주는 데 방점을 찍으려 노력하자. 그래야 가르침의 순간이 자존심 대결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강산을 두 번은 바꿀 수 있는 짬밥이다. 희끗한 머리털을 휘날리며 계속 허리에 손 얹고 대장 노릇 하지는 말자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 에필로그 -     


 떼쟁이들과의 즉각 대결을 피하고 보다 나은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가을투덜이, 친구에게 말도 안 되는 어깃장을 놓은 후 도리어 성을 잔뜩 내고 있는 녀석에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기로 한다.     


 “00아, 조금 전 가위 바위 보 졌다고 친구 종합장 찢은 것 맞아요?”

 “걔가 늦게 주먹 냈단 말이에요!”

 “선생님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

 “화가 너무 많이 나 있어 지금은 말해도 소용없겠네. 일단 마음 가라앉히고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스스로 생각해 봐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한 시간 뒤,     


 “00아, 생각해 봤어?”

 “뭘요?”

 “네가 친구 종합장 찢었잖아. 가위 바위 보 졌다고 화나서.

 “제가요? 야, 내가 그랬어?”

 “얘가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음···. 그냥 이 구역의 대장 계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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