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아파트’ 고향은

- 이제야 추억에게 작별을 고 합니다

by 가을투덜이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끝 무렵, ‘아파트’라는 곳으로 이사했다. 사업을 하여 부유했던 부산 이모 집에 놀러 가서야 만날 수 있었던 아파트는 어린 내게 새로운 세상, 그 자체였다. 거실이 있다는 것도, 연탄 없이 따뜻할 수 있다는 것도, 물만 내리면 뒤처리가 가능한 화장실(욕실이라고 해야겠다. 욕조도 있었으니까)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비만 오면 무릎까지 물이 차오르던 우리 집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매력적인 것은 승강기, 놀이기구라 해도 마땅할 그 신나는 녀석을 공짜로 타고 날마다 별천지로 향하는 생활이라니, 이모가 농담으로라도 “우리 집 딸 할래?”라고 물어봐 주었다면 나는 주저 없이 눌러앉았을 것이다.


우리도 그런 아파트로 간단다. 얼마나 들뜨고 흥분했던지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서운함은 조금도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풍선처럼 부풀었던 마음이 이사트럭 운전석 옆자리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조금씩 줄어들더니 허허벌판에 펼쳐진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보며 기가 질려 한순간에 쪼그라들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70년대 세워진 잠실 주공 아파트 대단지, 9살 눈에는 무시무시한 로봇 군대 같았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테지만 당시 잠실이 그랬다. 잠실(蠶室)이라는 지역 명에서 알 수 있듯 조선시대 누에를 기르던 곳이 70년대 정부 주도로 1만 5천 세대의 저층 아파트 대단지가 되었다. 나는 그 어마어마한 건물 무리를 본 거였다. 부산에서 경험한 ‘고급 진’ 느낌이 아니었다. 작지만 다부진 어깨를 가진 레고 로봇 부대 같달까. 4층이었던 우리 집을 향해 계단으로 올라가면서도 ‘어쩌면 벽 사이에서 승강기가 나올지도 몰라’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두 발로 뚜벅뚜벅 오르내려야 하는 아파트라니. 고작 17평인 새집의 거실은 너무 좁았고, 보일러이기는 했어도 여전히 연탄을 사용했다. 그나마 수세식 좌변기가 있었지만 욕조는 꿈도 꿀 수 없는 그냥 ‘화장실’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던 아파트는 부의 상징이었는데, 우리 집이 된 그곳은 서민용 주거공간이었을 뿐이었다.


잠실에서 5년을 살고 다시 한번 조금 더 서울의 가장자리, 둔촌 주공 아파트로 옮겼다. 비슷한 취지로 개발된 6천 세대 규모의 단지였다. 두 번의 이전 모두 엄마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이뤄지지 않을 성사였다. 부산만 가면 집에 돌아오기 싫어하는 딸들의 모습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아쉽게도 두 번째 아파트 역시 승강기는 없었지만, 25평으로 공간이 늘어나니 거실에 소파를 둘 수 있었고 화장실에는 욕조가 생겼다. 난방비에 휘청했어도 연탄보일러는 더 이상 없었다. 두 번째 아파트는 한층 더 높아진 5층이었지만 더 이상 승강기가 신기할 리도, 그 정도의 오르내림이 힘겨울 리도 없는 청소년이었다. 언니와 같이 쓰다 몇 년 뒤 온전히 내 차지가 된 방 창문 아래 보이던 메타세쿼이아는 37년을 함께 자라며 어느덧 건물보다 높아졌고, 나는 이곳에서 중학생부터 대학생, 백수, 월급쟁이, 공무원 등 여러 단계의 탈바꿈을 거쳤다.


40년 가까이 살았던 이곳의 기억이 모두 생생하지는 않다. 워낙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그곳은 단지 잠자는 곳에 지나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가 멀어 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경우도 드물었고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은 밤이 늦어서야 귀가하던 시절이었다. 집을 매개로 한 추억이 드물었던 시기였다고나 할까. 30대 중반 교사가 되고, 부모님 은퇴 후 뒤늦게 쌓인 추억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승강기는 없었지만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해 준 두 번째 아파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늙어갔다. 특히 5층 아파트 맨 꼭대기였던 우리 집은 추위가 큰 문제였다. 어마어마한 중앙 난방비를 지불하면서도 보일러를 따로 설치하고 방과 거실에 전기장판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도 평균기온이 15도가 채 안 되는 집안이 상상이 가시는지.

앉아 있으면 코가 시리다는 핑계로 엄마, 동생과 함께 전기장판에 누워 TV를 보거나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방에 혼자 계신 아버지의 생사확인(?)도 가끔 해 가며. 저녁에는 동생과 떡볶이 집을 가거나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부모님과 나누지 못할 고민과 걱정을 공유했다. 마무리는 늘 데몰리션 노래방, 에이리언 모양의 인테리어로 유명했던 그곳에서 두 명이라고는 믿지 못할 시간과 소리를 쏟아내며 고단함을 풀곤 했다.


개척정신이 뛰어난 엄마가 세 번째 이사를 추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의 반대였다. 등 대고 누울 곳이 비만 새지 않으면 문제 될 것 없는 아버지는 더워도 추워도, 5층 계단을 오르내려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나지막한 산이 있고 길만 건너면 공원이 있는 이곳을 정말 좋아했다. 서울에선 쉽게 만날 수 없는 맞은편 전통시장, 도처에 익숙한 맛집, 당신의 어디가 아픈지를 잘 헤아려주는 동네병원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사 외엔 방법이 없다는 엄마의 굳건한 지지자였던 나는 10년 전 암 투병으로 부모님 집에 기거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아버지가 왜 여기를 좋아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고층, 30년 넘게 자라 흔들림만으로도 편안해지는 가로수, 길만 건너면 없는 것 없는 가게들. 모든 것이 친숙하고 편안했다.

마실 나왔다 집에 가는 아버지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었다. 뒷짐 진 손에 들려 있는 비닐봉지. 시장에서 산 꽈배기 같기도, 동네 약국에서 산 영양제 같기도 했다. 양 옆에 깔린 좌판을 이리저리 기웃하며 느긋하게 걸어가던 풍경, 그 평화로움이 내게는 고향과도 같은 둔촌동의 대표 추억이 되었다.


치료를 끝내고 복직 후 정기검진을 위해 집에 방문했을 때였다. 정부의 시책에 휘둘려 좀처럼 진행되지 않던 재건축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어 매물을 걷어 들이던 시기였다. 낡은 집에 질린 대로 질린 엄마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며 다독인 후 약속을 다녀왔는데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 그 저녁에 중개업자의 꼬임에 빠져 덜컥 매도 계약을 하신 거였다. 심지어 잔금도 치르기 전 명의변경을 해주어 이 집을 담보로 값을 치르는 말도 안 되는 방식이었다. 돈 냄새 맡은 이들에게 눈뜨고 코 베인 셈이었다고나 할까.


어디로 갈지 대책도 없이, 이제부터 오를 일만 남은 집을 상의 한번 없이 처분하다니. 부모님의 집이니 두 분이 결정함이 당연했지만 40년간 가까이 몸담은 시공간을 한순간에 찬탈당한 기분이었다. 상속 지분에 대한 계산기를 두드렸음도 부인할 수 없다. 급작스런 매도 이후 온 가족이 엄청난 혼란과 갈등을 겪어 깊은 상흔이 남아 더욱 마음 아픈 이전이었다. 그래서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 단지라는 이곳에 새로운 아파트들이 들어선 후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로 근처를 가게 돼도 차마 시선이 향해지지 않았다. 서울의 새로 지어진 아파트들이 그렇듯 빽빽이 들어선 외양만으로도 저절로 고개가 돌려졌다. 편안함과 평화로움으로 자리한 추억마저 빼앗길까 두려웠다.


떠난 지 9년, 이제야 달라진 그곳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 비 오던 여름의 어느 날, 둔촌동을 찾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난해 말에야 간신히 완공된 단지는 하나의 거대도시였다. 두 개의 행정복지센터, 도서관, 경찰서에 초,중,고등학교, 없는 게 없는 편의시설까지. 예상했던 대로 내가 알고 추억하던 풍경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단지 밖 도로의 가로수는 여전히 풍성해서 좋았다. 동생과 틈만 나면 찾던 노래방은 사라졌지만 떡볶이 집은 지금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맞은편 가게들 중 번듯하게 들어선 상점은 놀라웠고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전통시장은 반가웠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떡볶이집과 전통시장

세월의 변화, 내가 기억하는 추억의 되새김질에 콕콕 찔려 아프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뒷짐 지고 느긋하게 걷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러려고 9년의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이제야 내가 살던 아파트 고향, 나의 추억에 안녕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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