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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서 Oct 20. 2021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어느 여름밤, 작은 포차에 세 여자가 모였다. 금요일이라 왁자지껄하게 소란스러운 가운데 Y와 L 그리고 내가 앉아있었다. 우리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막내 시절을 버텨낸 동기들이다.      


L은 깡마른 몸에 몇 년째 까만 머리를 고수하는 취향이 확고한 친구였다. 2년 후배인 그녀는 만날 때마다 진한 다크 서클을 달고는 입버릇처럼 내게 물었다. 선배! 작가는 언제 주말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요?라고. 그녀는 소위 ‘막내’라고 불리는 취재작가 시절부터 작가의 근무환경에 불만이 많았다. 친구를 만나고 오면 하루는 꼭 쉬어줘야 하는 약골이었고, 가족 경조사라도 다가오면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쪽잠을 자는 일이 있더라도 전주에 다녀와야 하니 그녀에겐 개인 시간이 필수였다. 그런 맥락에서 L이 워라밸을 주장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L은 원래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었다. 20대 초반, 알바비를 털어 아카데미 - 드라마 반을 등록했더니 수업 내내 연륜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다며 분개했다. 이럴 바엔 밥 대신 빵이 낫지라며 선택한 게 TV 구성작가의 길이었다고 했다.             


쓰디쓴 막내 시절을 지나 몇 년 후 L은 입봉을 했고, 코너 하나를 통째로 맡아서 하는 서브 작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연히 모든 걸 내려두고 방송 판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많이 힘들어?”   

“선배 저 이제 더는 못하겠어요”      


수화기 너머로 L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L은 일에 대한 압박을 받으면 그게 곧 얼굴에 나타나는 스타일이었는데, 잠도 못 자서 까매진 얼굴로 죽상을 하고 앉아있으니 메인 작가가 자신을 계속 갈구더란다. 하지만 실상은 이랬다. 당시 L은 1시간짜리 육아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는데 메인 작가와 서브 작가가 한 팀으로 움직였고 3팀이 돌아가면서 제작을 했다고 한다. 서브 작가였던 L을 서포트 하는 취재 작가 A가 있었는데 A는 소속 없이 가장 급한 팀에 붙었다고 했다.      


심각한 인력난으로 그녀는 자료조사부터 섭외, 구성안 작성, 촬영 준비에 방송 후반 작업까지 도맡아 하다 보니 과부하가 왔다고 했다. 어느 주말엔 집에서 구성안을 쓰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카-톡 카-톡 카-톡이 울려댔고 결국 핸드폰을 벽에 던졌다고 했다. 극도로 예민해진 L은 잦은 실수를 했고 메인 작가에게 혼나는 일이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감정이 상하더란다. 일에 집중이 안되니 또 다시 실수를 하게 되고 그런 일상이 뫼비우스띠처럼 이어지다 결국 백기를 들었다.      


“잘했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한마디가 다였다.      


L에 비해 Y는 체구가 작았지만 목소리는 화통을 삶아먹은 듯 100미터 밖에서도 들렸다. 또, 평소에도 말을 맛있게 해서 우리 사이에서는 개그맨으로 통했는데, 대학 시절엔 말발에 글발까지 좋아서 문창과에서 좀 날라 다녔다며 어깨를 들썩이곤 했다. 매주 네일 아트를 바꾸던 부지런한 Y는 그걸 미끼로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미친 친화력의 소유자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방송작가가 꿈이어서인지 밤샘 작업을 해도, 주말 근무를 해도 언제나 싱글벙글했다. 가끔 새벽에 일할 땐 이러다 죽겠다 쌈밥!하며 메시지가 오곤 했지만 그저 잠을 깨기 위한 농담 중 하나였다.      


밤샘 작업으로 침대에 널부러져 있을 무렵, Y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 병원이야” 

“왜? 어디 아파?” 

“오십견”  

“뻥치지마”      


그녀는 곧바로 병원 인증샷을 보내왔다. 심지어 이미 수술까지 마친 상태라고 했다. Y는 환자복을 입고 있어도 유쾌했다. 하필이면 오른쪽 어깨가 아파서 밥도 혼자 못 먹는 게 조금 불편하다고만 했다. 생각해보니 Y는 가끔 어깨가 뻐근하다, 손이 저리다라고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노트북 좀 바꾸라고, 이건 무기라고 놀렸던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변명하자면 이건 온전히 작가 선배들 탓이기도 하다. 주위에 손목에 밴드 안 붙여본 작가 선배들이 없었고, 장시간 대본 작업으로 쉬는 날이면 마사지 받는 건 필수 코스였으니까.       


“보험은 있지?” 

“응. 실비 들어놓은 거 있어” 

“다행이다. 당분간 일은 못하겠네?” 

“재활 치료 받으래”       


그 이후로도 종종 Y는 도수치료를 받는다, 비타민 주사를 맞는다면서 근황을 알려왔다. 다행히도 그녀의 어깨는 빠르게 회복됐고 3개월 후에는 일을 해도 무리가 없다는 의사의 소견이 더해졌다. 수술 전 Y는 시사 프로그램의 작가였다. 어렵게 기회가 왔고, 평생의 소원이라던 시사 프로그램의 꿈은 오십견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꿈의 자리는 잃었지만, 다행히도 일자리는 또 있었다. 건강 프로그램 면접을 봤는데 런칭이 얼마 남지 않아 바쁘다고 했다.      


1년 후, 그녀에게 또다시 오십견이 찾아왔다.      


이번엔 반대쪽 어깨였다. 수술 후 Y는 일주일에 2번, 재활치료 외에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낮과 밤이 바뀌어 오전 6시에 잠들고 오후 2시에 일어나길 한 달째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다 우울증에 걸릴까 싶어 드라이브를 가자고 꼬셔도 봤지만 귀찮다고만 했다.      


나와 L 그리고 Y가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인 건 거의 1년 만이었다. L은 일을 그만둔 후 얼마 동안은 매일 잠만 자고, 또 얼마 동안은 매일 드라마만 봤다고 했다. 이후엔 심심해서 카페에서 일을 하면서 지내는데 대학 때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둔 게 있어 취업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고 했다. 오랜만에 보는 L의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너는 작가일 계속 하고 싶어?” 나는 Y에게 물었다     

“응” 

“언제까지?”

“나 부르는 데 있을 때까지” 

“페이 잘 안 맞춰주려고 한다며.”      


동료 작가들이 말하길 교양 프로그램은 제작비가 부족해 일정 연차가 되면 페이가 동결된다고들 했다.       


“예능 쪽은 연차만큼은 챙겨주던데... 예능으로 옮겨보는 거 어때?”      

나의 제안에 Y는 고개를 저었다.       


“경력이 없는데 누가 나를 써”

“그렇긴 하지...”       


목이 타는 지 Y는 술을 연신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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