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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서 Feb 16. 2022

건강검진이 부른 쓸모없는 상상

죽음에 관하여 

“엄마 정밀 검사 해봐야 한대”

“왜?”

“건강검진 했는데 폐에 뭐가 보인대”

“아… 어떻게 해야되는데?”

“일단 대형 병원에 예약해놨어, CT촬영 해야한대” 



얼마 전 나눈 대화다. 매년 으레 해오던 엄마의 건강검진이 올해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엄마는 폐에 뭔가 보여서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병원에서 일하는 동생이 있어서 더 빨리, 더 좋은 선생님에게 한 번에 CT촬영까지 마칠 수 있었다. 보통의 경우 대학병원에서 진료받으러 간 당일, 외래 환자가 사진까지 찍는 건 드문일이다. 일주일 후 결과가 나왔다. 폐에는 문제가 없지만 간에 문제가 있다고 다시 예약 날짜를 잡고 왔단다. 동생 말로는 엄마가 내색은 안했지만 이 문제로 꽤 마음 고생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내심 큰 병일까 싶어서 걱정은 됐지만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고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이 간단한 명제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지금껏 가까운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어 괜히 마음이 찌릿해진다. 오랫동안 혼자 살았던 내게 죽음의 의미는 누군가 나에게 해코지를 해서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하철에서 술 취한 아저씨가 따라와서 한 동안 지하철을 못 탈 정도로 공포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괴한에 습격이 아닌 질병으로 이별을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문득 엄마가 암 투병 중에 돌아가신다면? 이라는 상상을 한다. 정기검진 결과가 불러 일으킨 아주 무서운 상상이다. 현실감이 없어서인지 눈물이 핑 돌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라는 현실적인 생각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고개를 흔들어 이 바보 같은 상상을 지운다. 이번엔 다른 상상을 해본다. 만약 죽음을 코 앞에 둔 사람이 어릴 때부터 꼭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한다면? 드라마 <나빌레라>의 주인공처럼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하면 나는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있을까? 또 다시 생각에 잠긴다.


 

할아버지 두 분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이 기억나지 않고, 고등학생 시절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철이 안들어서 '죽음'이라는 게 확 와닿지 않았다. 나는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안다. 지인들의 부고 문자를 받고 네이버 지식인의 수 많은 예시들 중 가장 적절한 답을 골라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처럼, 늘 어정쩡한 위치에서 곁에 머문다. 언젠가 내가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이라는 것도 안다. 



나는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애초에 불가능하다. 수 많은 드라마들과 영화, 책을 통해 간접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거대한 슬픔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일 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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