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엄마 정밀 검사 해봐야 한대”
“왜?”
“건강검진 했는데 폐에 뭐가 보인대”
“아… 어떻게 해야되는데?”
“일단 대형 병원에 예약해놨어, CT촬영 해야한대”
얼마 전 나눈 대화다. 매년 으레 해오던 엄마의 건강검진이 올해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엄마는 폐에 뭔가 보여서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병원에서 일하는 동생이 있어서 더 빨리, 더 좋은 선생님에게 한 번에 CT촬영까지 마칠 수 있었다. 보통의 경우 대학병원에서 진료받으러 간 당일, 외래 환자가 사진까지 찍는 건 드문일이다. 일주일 후 결과가 나왔다. 폐에는 문제가 없지만 간에 문제가 있다고 다시 예약 날짜를 잡고 왔단다. 동생 말로는 엄마가 내색은 안했지만 이 문제로 꽤 마음 고생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내심 큰 병일까 싶어서 걱정은 됐지만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고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이 간단한 명제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지금껏 가까운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어 괜히 마음이 찌릿해진다. 오랫동안 혼자 살았던 내게 죽음의 의미는 누군가 나에게 해코지를 해서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하철에서 술 취한 아저씨가 따라와서 한 동안 지하철을 못 탈 정도로 공포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괴한에 습격이 아닌 질병으로 이별을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문득 엄마가 암 투병 중에 돌아가신다면? 이라는 상상을 한다. 정기검진 결과가 불러 일으킨 아주 무서운 상상이다. 현실감이 없어서인지 눈물이 핑 돌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라는 현실적인 생각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고개를 흔들어 이 바보 같은 상상을 지운다. 이번엔 다른 상상을 해본다. 만약 죽음을 코 앞에 둔 사람이 어릴 때부터 꼭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한다면? 드라마 <나빌레라>의 주인공처럼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하면 나는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있을까? 또 다시 생각에 잠긴다.
할아버지 두 분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이 기억나지 않고, 고등학생 시절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철이 안들어서 '죽음'이라는 게 확 와닿지 않았다. 나는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안다. 지인들의 부고 문자를 받고 네이버 지식인의 수 많은 예시들 중 가장 적절한 답을 골라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처럼, 늘 어정쩡한 위치에서 곁에 머문다. 언젠가 내가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이라는 것도 안다.
나는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애초에 불가능하다. 수 많은 드라마들과 영화, 책을 통해 간접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거대한 슬픔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일 밖에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