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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소리 Jun 17. 2023

시칠리아에 웬 신성로마제국?

[시칠리아 여행 6] 팔레르모에서 만나는 슬픈 기억의 흔적

팔레르모 구 도심에서 엠마누엘레 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걷다 보면 높다란 벽돌 성벽이 거리를 가로지르며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안내문에는 포르타 누오바라 적혀 있는데, 글자 그대로 읽자면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이다. 기록을 보면, 153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정복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다. 지중해 한복판 시칠리아 섬에 독일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기념물이라니 잠시 어리둥절할 만하다.

 

팔레르모와 인근 지역을 다니다 보면 이외에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카를 5세의 흔적을 종종 만나게 된다. 포르타 누오바에서 동쪽을 향해 난 엠마누엘레 거리 중간에 있는 작은 광장에서는 월계관을 쓴 자그마한 로마풍 인물의 동상을 만나게 되는데 이 역시 카를 5세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팔레르모 구도심의 프로타 누오바. 튀니지 정복을 기념해 500년 전에 세운 '새 문'이다.


카를 5세는 16세기 유럽에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수장이자 유럽 전역에서 방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여러 왕위를 겸한 국제적 인물이다. 그는 상징적 지위뿐이긴 하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 감투에다, 지금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페인, 이탈리아의 국왕 왕관 외에도 네덜란드, 프랑스 부르고뉴, 멀리 신대륙인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온갖 지역에 영토와 작위를 보유했다. 신대륙에서는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왔다. 유럽 곳곳에서 국왕을 겸했기 때문에, 그의 공식 명칭 역시 독일어권에서는 카를 5세이지만,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 4세로 불린다.

카를 5세의 복잡한 문장은 그의 벙대한 재산 목록을 잘 보여준다.

그의 이 엄청난 위상과 재력은 사실 집안 덕분이다. 그는 영토 유럽 중세와 근세를 통틀어 최고의 금수저 집안 출신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가 스페인 공주였던 덕분에, 운 좋게 외가에서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았고, 아버지에게서 오스트리아에다 남부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부르고뉴까지 방대한 땅과 왕위, 작위를 상속받았다. 유럽 최대 땅부자답게 카를 5세의 복잡한 문장을 보면 그의 긴 영토 목록을 알 수 있다. 황제 외에 여러 나라의 왕위와 백작, 공작 등의 작위만 더해도 얼추 20개 정도에 이른다.

팔레르모 엠마누엘레 거리 중간 광장에는 카를5세의 동상이 남아 있다.  

카를 5세는 재위 중 수많은 전쟁을 치렀는데 그중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튀니지 일대를 정벌해서 정복했고 이를 기념한 유적이 포르타 누오바다. 튀니지 정복을 기념해 문을 건립 해가 1535년이었고, 1667년 화약고 폭발로 파괴되어 2년 후 다시 세웠다. 이름은 새 문이지만 약 500년 정도 된 오래된 문인 셈이다. 문 바깥에서 보면 입구 양쪽 기둥에 사람의 모습을 새긴 조각이 있는데, 이를 건축 용어로 텔라몬이라고 한다. 여기에 새긴 4명의 인물은 쇠사슬에 묶이거나 수족이 잘린 모습을 하고 있는데, 당시 카를 5세가 정복한 무어인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팔레르모에서 에리체 투어를 위해 트라파니에 들르면 이 항구도시 해변에 성채가 일부 남아 있는데, 이 역시 당시 튀니지를 정복한 후 이곳에 들른 카를 5세의 명으로 세운 군사 방어 시설의 흔적이다. 이 성채는 당시 늪지대를 메워 성벽을 올리는 난공사를 거쳐 완공되어, 불가능의 요새라는 별명도 얻었다. 물론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어, 이런 사연을 알지 못하면 그냥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눈에 띄는 유적은 아니다.

트라파니 항구 해변 가에 남아 있는 성채. 카를 5세가 해적으로부터의 방어용으로 쌓은 요새였다.

사실 카를 5세의 업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튀니지는 카를 5세가 정복한 후 34년 후인 1569년 다시 오스만에게 넘어갔고, 이후에도 몇 차례 주인이 바뀌는 공방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시칠리아 인들이 이 사건을 두고두고 기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로마가 무너진 후 지중해 전역은 이슬람 해적이 설치는 무법의 땅이 됐다. 이들은 ‘사라센’이라 불리며 주로 북아프리카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했다. 주로 유럽 해안 지대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았다. 북아프리카 해안 지대에는 옛 로마 시대에 지은 원형경지장이 많았는데, 잡혀온 노예는 주로 여기에 수용되었다. 사라센 해적의 본거지가 바로 지금의 튀니지 땅에 있었으니 당연히 거리가 가까운 시칠리아는 가장 손쉬운 공략 대상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중세가 끝날 때까지 수백 년 이상 이어졌다. 유럽 국가에서는 돈을 모아 잡혀간 사람들을 되사오는 수도사 단체가 여럿 있었을 정도로 약탈은 기승을 부렸다. 그러니 시칠리아 사람들이 보기에 비록 일시적이지만 해적의 본거지인 튀니지 정복은 기념비라도 세워 오래 기릴 만한 대단한 사건이었다. 지금도 지중해변의 로마 유적이나 작은 성을 보면, 험한 운명을 감수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중세인의 슬픈 삶이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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