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로망처럼 첫 손에 꼽히는 데가 있는데, 바로 에리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본 사람이라면 이 바닷가 언덕 위의 옛 도시 에리체야말로 만화의 생생한 기억과 느낌을 떠올리기에 좋은 곳이다. 하야오의 팬이 아니더라도 높은 언덕 위에서 지중해를 훤히 내려다보는 멋진 풍광만으로도 에리체는 매력적이다.
에리체는 시칠리아의 대표 관광지이건만 방문자에게는 친절함과 거리가 멀다. 일단 팔레르모 중앙역 뒤편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서 트라파니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해 중앙역을 돌아가기도 전에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졌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쳐갔고, 이 느낌은 곧 한치도 틀림없이 현실로 나타났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쨍쨍하게 개었고 어지럽고 번잡한 시가지를 지나 교외로 접어들자 시원한 해안이 나왔다. 벌판, 구릉지대를 따라 버스로 두 시간 정도 더 달린 후 트라파니에 도착했다. 여행 안내서에는 여기서 시내버스 찾아서 타고 도심 대로 끝에서 내린 후 언덕을 오르는 케이블카를 타면 된다.... 고 적혀 있다(해봐라. 잘 되나). 그러나 가이드북은 무용지물이었다.
창 너머로 지중해를 바라보면서 케이블카로 황량한 비탈을 오르면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성문을 만나게 된다.
어쨌든 한참 시간을 허비한 후 우여곡절 끝에 에리체로 가는 케이블카에 올랐다. 창너머 저 아래에는 비죽 튀어나온 트라파니 반도 양쪽으로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조금 전의 짜증스러운 기억은 금세 사라졌다. 이끼로 덮인 성벽을 들어서면서 저 흔적에 담긴 세월의 무게를 생각했다. 바닥에는 거친 질감의 작은 돌이 깔려 있고, 양쪽 벽은 시간의 두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끼가 두껍게 끼어 있었다. 작은 마을이 관광지 화하면서 생긴 문제점은 여기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외지인이 몰려다니는 주 도로를 한 발만 벗어나면 에리체 마을은 마치 12세기의 과거로 되돌아간 듯 그 모습, 그 분위기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골목길은 마구잡이로 나 있어 지도도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딱히 정해진 목적 없이 골목과 작은 광장을 거닐면서 가게나 식당, 교회 언저리를 기웃거렸다. 특별히 봐야 할 숙제도 없고 이정표적인 건물도 없어, 그냥 도시의 느낌 자체가 구경거리인 곳이라 마음이 참 편했다. 고즈넉함이란 단어가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마을이었다.
에리체 성은 세월의 이끼가 가득한 돌로 쌓은 도시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화창하고 맑은 여름 날씨였는데, 안개인지 구름인지 차가운 기운이 거리를 뒤덮고 빗방울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쌀쌀한 기온에 다시 겉옷을 꺼내 걸쳤다. 바닷가의 고지대라 날씨가 무척 변덕스럽다고 한다. 마을이 끝나는 언덕배기 골목 어디쯤에서 나지막한 돌계단 위에 걸터앉아 늦은 점심용으로 가져간 빵과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낯선 이방인이 신기한지 고양이 세 마리가 주위를 배회하더니 한 마리는 아예 자리를 잡고 맞은편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에리체 시에서는 아예 마을 녹지대 몇 군데를 고양이 보호구역으로 지정해두어 고양이는 여기저기 편안한 자세로 진을 치고 있었다. 이 마을 고양이는 낯선 사람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는 듯하다.
이리체 시에서 고양이 보호구역이란 팻말을 설치한 공터가 여러 군데 있다. 이곳 고양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하다.
느긋한 체하며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여행 안내서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바로 그 사진의 현장인 이른바 비너스 성이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마침내 그 자리에 서니 이유를 깨닫게 됐다. 기독교가 들어오긴 전 이 요새 정상에는 비너스 신전이 있었다. 신전을 허문 후 그 터에 이른바 ‘비너스 성’이 들어섰는데, 지금은 인증숏을 남기려고 너나 할 것 없이 카메라를 눌러대는 여행자만 줄지어 있었다. 성은 마침 닫혀 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압권은 부서진 조각이 널린 성 내부보다는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에 있다.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니 멀리 왼쪽으로는 트라파니 염전과 오른쪽으로는 카포 곶, 그 너머의 지중해까지 넓은 지역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산의 높이는 750미터에 불과하지만 바닷가 평지에 갑자기 솟아있어, 실제로 느껴지는 높이는 훨씬 위압적이다. 지금 여행자들이 감탄하는 전망대는 과거에는 대개 군사적 목적의 요새였다.
비탈 위에 서 있는 비너스 성.
비너스성 부근에서 내려다본 지중해 풍광. 이곳에 서면 외 페니키아인이 여기에 요새를 세웠는지 깨닫게 된다.
일찍이 페니키아와 그리스 시절부터 이후 시대를 거치면서 지중해의 이 전략적 요충지에는 어김없이 요새가 들어서 있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저 풍경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자연경관 때문인지, 세월이 남긴 역사적 건축의 흔적 때문인지, 아니면 돌벽 위를 덮은 이끼만큼이나 쌓이고 쌓은 수많은 기억이 주는 착시 때문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