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를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시네마천국>이다. 시칠리아의 바닷가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소년 토토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이 영화는 유럽 소도시의 조용한 아름다움과 고향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분위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마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인지 심지어 1960년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보다 훨씬 더 옛 영화같이 느껴지곤 했다. 이 영화가 팔레르모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체팔루에서 촬영되었다기에 한번 다녀오기로 했다.
팔레르모 중앙역에서 체팔루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무궁화 열차를 연상시키는 작은 기차는 한눈에 봐도 관광객 티가 팍팍 나는 인파로 북적였다. 모두 관광객 특유의 옷차림에 소풍 가는 날인 양 들뜬 분위기였다. 기차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체팔루의 작은 시골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는데, 어디로 갈지 두리번거리며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관광객들이 떼 지어 몰려가는 방향으로 나도 뒤따라 걸었다. 이탈리아 소도시 특유의 좁은 거리 양쪽으로는 기념품 가게와 낯익은 메뉴를 내건 음식점, 카페 따위가 진을 치고 있었다. 영화 한 편으로 나른한 시골 마을이 졸지에 유명 관광도시로 변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거리에서 갈라진 작은 골목에는 계단 곳곳에 화려하게 채색된 항아리나 꽃으로 장식해 놓았다. 일부 관광객들은 앞다투어 카메라를 들이댔다.
체팔루의 중심가인 두오모 광장은 식당과 카페 거리로 늘 번잡하다.
얼마 가지 않아 도시 중심부인 두오모 광장이 나왔다. 깎아지른 듯한 로카 절벽 바로 아래 바닷가 낡은 주택가 사이로 주변보다 조금 높은 계단 위에 고풍스러운 두오모 성당이 광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고딕에 아랍풍, 노르만 양식이 뒤섞인 유서 깊은 건축물이라 했다. 성당 본당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커다란 예수상이 비잔틴 풍의 황금빛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었다. 몬레알레, 팔레르모의 대성당과 더불어 노르만 양식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오른 건축물이다. 성당 종탑이나 지붕, 클로이스터 등 부속 시설을 보려면 별도로 티켓을 사야 한다고 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티켓에 적힌 순서대로 성당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한쪽에서는 미사가 진행 중이어서 좀 민망했다. 딱히 이렇다 할 인상적인 구경거리는 없었지만, 낡은 종탑 창문과 지붕에서 내려다본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마을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아직 관광지 풍토에 물들지 않은 탓인지 안내하는 직원들도 친절하고 순박했다.
이 작은 도시에서는 옛 성당 유산과 허름한 서민 주택, 지중해의 푸른 바다, 하늘이 조화를 이룬다.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이나 카페로 가득해 혼잡스러웠다. 이제 체팔루의 대표 이미지인 로카 언덕을 찾아 나섰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로카로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 여기저기 묻다가 벨기에에서 온 젊은 커플과 방향이 맞아 동행하게 됐다. 남자의 여동생이 한류 드라마 팬이라고 해서 한동안 한국 이야기로 화제의 꽃을 피웠다. 로카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힘들었다. 10월 중순의 시칠리아는 여전히 한여름의 햇살로 뜨거웠다. 그리스 로마 시절에는 이 언덕 정상에 다이애나 신전이 있었고, 이후 이곳을 지배한 아랍과 노르만은 바다를 굽어보는 정상에 요새를 쌓았다고 했다. 언덕 비탈 여기저기에는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폐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책에서 본 이미지와 딴판이었다. 아무래도 방향을 잘 못 잡은 듯했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포기하고 하산하던 길에 우연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로카 입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언덕 벼랑을 따라 돌로 포장된 성벽 길이 있었는데, 여기가 바로 그 지점인 듯했다. 수직 절벽 바로 아래로 체팔루 구도심의 붉은 지붕들이 지중해의 푸른 물과 어우러지면서 그림 같은 장면을 자아냈다. 바로 내가 찾던 그 장면이었다.
로카 언덕 벼랑에서 도심을 내려다보고 찍은 이 장면은 체팔루의 대표 이미지다.
로카 언덕에서 벼랑을 따라 선 나지막한 성벽에서는 지중해와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언덕을 내려와서 시내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렸다. 영화의 장면과는 달리 체팔루에는 뜨내기 방문자로 소란스러운 관광지의 상업적 거리뿐이었다. 거리를 다니면서 영화의 장면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시네마천국>의 극 중 배경은 가상의 도시 지안칼도로 되어 있지만, 상당 부분을 체팔루에서 찍은 건 사실이다. 그런데 알아보니 팔레르모 인근의 소도시 바게리아와 팔라조 아드리아노 등지에서 나누어 촬영했다고 한다. 영화 속의 극장은 팔라조 아드리아노의 고풍스러운 17세기 바로크 분수대 광장 부근에 세트로 지은 것이라 한다. 체팔루에 오기 전 좀 더 알아보았어야 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적하고 고즈녁 한 체팔루가 영화 한 편 때문에 전형적인 뜨내기 관광도시처럼 변한 게 못내 가슴 아팠다. 아마 이곳을 영화 촬영지로 잡은 것은 영화 분위기에 맞게 거의 심심할 정도로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간은 흘러가면 기억 속의 장소는 사라지게 마련이다. 내 추억 속의 체팔루는 어디로 갔을까?
체팔루는 짧은 기간에 북적이는 관광도시로 변했지만, 아직도 골목길로 접어들면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일정을 마치고 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광객으로 흥청거리는 거리를 벗어나 잠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길에는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 한적했고 좁은 길 양쪽 주택에는 빨래가 널려 있고 집 앞에는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시칠리아의 다른 도시처럼 일부 집 모퉁이에는 성모상을 세워 작은 기도 공간으로 조성해 놓았다. 체팔루는 소란스러운 표면의 한 꺼풀만 벗기면 여전히 시네마천국에 나오던 평화로운 옛 마을의 분위기를 드러낼 것 같았다. 역에 도착하니 간발의 차로 기차를 놓쳐 한참을 기다려 겨우 다음 차를 잡아탔다. 인파로 미어터진 작은 기차는 잠시 달리다가 어느 시골 역에 서더니 다시 출발할 생각도 않는다. 지나가는 차장에게 몇 번이나 물어도 심드렁하게 그냥 기다리라는 짧은 답변뿐이다. 승객들도 별반 서두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칠리아에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것도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