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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소리 Jul 10. 2023

시라쿠사에서 그리스를 상상하다

[시칠리아 여행 13] 시라쿠사의 구시가지 탐방

시라쿠사에 온 지 사흘이 지났다. 이곳은 아마 영어식인 시라큐스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더 친숙할 것이다. 시라쿠사는 시칠리아에 있지만 이탈리아 보다는 뭔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시라쿠사는 인구가 12만 정도에 불과해 우리 기준으로는 도시 축에도 끼지 못하는 규모다. 이 작은 시칠리아 도시에서는 현재보다는 과거, 그것도 아주 오랜 옛날 그리스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 적어도 잠시 스쳐 가는 여행자 눈에는 그렇다.     

외부인이 시라쿠사에 오면 크게 두 군데를 방문하는데, 역을 기준으로 동남쪽의 역사 지구 오르티쟈 섬과 서북쪽의 고고학 공원이 있다. 이 모든 장소에 그리스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그리스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 시칠리아는 그리스 문명의 큰 영역, 즉 마그나 그레코의 중요 거점이었다. 유명한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고향이 바로 시라쿠사였다. 오르티쟈 섬을 걷다 보면 아르키메데스의 이름을 딴 광장을 만나게 된다.

아르키메데스 광장 중앙에는 사냥의 여신 다이내나 상을 올린 분수대가 있다.

숙소를 오르티쟈 섬 초입에 잡은 덕분에 아침 저녁으로 아폴로 신전 앞을 지나다니게 됐다. 이 그리스 도리아식 신전은 건축연대가 무려 BC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시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보고 있다. 지금은 울타리가 쳐진 커다란 공터에 주춧돌과 일부 기둥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폐허만으로도 전성기의 웅장한 신전 모습을 상상해보기엔 충분하다. 숙소에서는 인근 카페에서 아침을 제공했는데, 매일 마침 신전에 비치는 아침 햇살을 보며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는 것은 사소하지만 유쾌한 일과였다. 

      

아침 햇살을 받은 아폴로 신전의 폐허를 바라보면서 카푸치노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신전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걸어 가면 아레투사의 샘이란 연못이 나온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의 짝사랑 이야기가 얽힌 곳이다. 기원전 7세기 무렵에는 그리스가 지배한 지중해 전역에서 시라쿠사가 아테네를 제치고 가장 큰 도시였다고 하니 신화 한 귀절이 남지 않은 게 아마 오히려 더 이상할 거다. 영광스럽든 수치스럽든 역사는 꼭 건물이나 기념비 같은 물리적 자취를 남기지 않더라도 오래 전승되는 이야기나 이름을 전해주게 된다. 산책을 멈추고 보호 난간 아래도 푸르른 샘을 바라보면서 그 시절 그리스인들의 영광과 치욕이 얽힌 영웅담과 더불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본다.     

아레투사 샴에는 샘의 요정 아레투사와 강의 신 알페이오스의 비극적 사랑의 전설이 담겨 있다.

물론 그리스가 무대에서 사라진 후 지배자가 로마인, 아랍인, 스페인인 등으로 바뀌면서 시라쿠사 곳곳에는 여러 문화의 흔적이 겹겹이 쌓였다. 시라쿠사의 방문지에는 다양한 문화가 뒤얽힌 복합 유산이 많다. 오르티자 섬 중앙 광장에 있는 대성당 두오모가 산 증인이다. 이곳은 원래 그리스 시절 아테네 신전이 있던 자리다. 신전 바깥에는 거대한 아테네의 황금 신상이 서 있어 멀리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에게 등대 구실도 했다. 시칠리아가 기독교 지역으로 전환한 후 신전 자리에는 성당이 들어섰다. 이 성당은 17세기 말 대지진으로 무너진 후에 바로크식으로 재건했는데, 원래 아테네 신전의 구조가 지금도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십자가와 기독교적인 조각이 없었다면 이 성당은 이교도 신전으로 착각할 만한 이국적 구조를 간직하고 있다. 거대한 아테네 신상이 있던 자리엔 성모 마리아상이 들어섰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칠리아에는 유독 여자 성인의 이름을 딴 성당이 많다.     

두오모 성당은 아테네 신전을 개조한 것이다. 파사드는 17세기 바로크 식이지만 건물 구조는 그리스 신전의 도리아식 기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꼭 역사 답사가 아니더라도 해질 무렵 섬 해안가를 따라 정처 없이 거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섬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기에 거리를 거닐다 보면 종종 과거로 시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라쿠사에서도 오르티쟈 섬은 유명한 관광지인 만큼 뜨내기 손님으로 넘쳐났다. 하지만 일부 거리만 벗어나면 그냥 시칠리아 작은 도시의 조용한 풍광과 분위기가 남아 있다. 팔레르모 물가에 익숙해지다 보니 관광지 물가가 좀 바가지로 느껴질 때가 많지만, 어차피 난 곧 떠날 몸이 아닌가. 바가지도 여행 경험의 일부다. 

오르티쟈 섬 해안을 따라 고즈녁한 산책로가 이어진다.
골목을 걷다보면 영화 대부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카페를 만나게 된다.
오르티쟈의 중심지 두오모 광장은 유적과 관광객으로 늘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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