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15] 시라쿠사에서 라구사 가는 날
시라쿠사에 머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구시가지의 해변이나 골목길을 느긋하게 산책하곤 했다. 산책은 별 시급한 목적 없이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삶의 특권이다. 산책은 특히 큰 볼거리가 많지 않은 소도시 여행지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인 셈이다. 시라쿠사에는 도시의 편리함과 함께 그런 여유가 있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어느덧 시라쿠사를 떠나야 하는 날이 왔다.
시라쿠사 중앙역에서 라구사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갔다. 예정 시간이 다 되어가는 데도 기차가 오지 않아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역무원이 뭐라고 하면서 다른 플랫폼으로 가라고 한다. 이탈리아 답게 여기서는 중요한 정보는 알아보기 쉽게 적혀 있지 않다. 기차는 운 좋게 제시간에 출발했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연착과 불편은 악명 높은 시칠리아 기차여행에서 피할 수 없는 일부일 뿐이다. 기차가 높은 산허리로 난 철길을 달리는데 저 멀리 벼랑 끝에 매달린 듯한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라구사가 가까워진 것이다.
손바닥 만한 숙소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역 광장으로 내려섰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두 아가씨에게 숙소 가는 길을 물으니, 버스를 타야 하는 거리라고 했다. 이들이 일러준 버스에 올랐더니 거의 곡예에 가까운 수준으로 계곡과 절벽을 넘나들며 수시로 휘어지는 산길을 따라 차가 달린다. 나는 등골이 오싹한데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덤덤한 표정이다. 버스가 종점에 멈춰 서고 나도 따라 내렸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두 아가씨가 일러준 버스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숙소 주인과 약속한 시간이 훌쩍 넘어가면서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결국 인근 카페의 직원에게 도움을 청해 택시를 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천천히 걸어가도 될 만한 거리인데, 오히려 차를 타는 바람에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적한 골목길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더니 주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준다. 좁고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으로 가방을 끌고 올라갔다. 방은 아담한 시골 마을 하숙집 분위기에 가까웠다. 주인이 보여줄 게 있다면서 베란다로 나가 바깥을 가리킨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베란다 아래로 언덕 위 등성이를 따라 수백 년 된 작은 성당과 나지막한 주택이 닥지닥지 들어서 있는 고풍스러운 모습은 너무나 평화로우면서도 이국적이었다.
라구사 구시가지는 두 개의 깊은 골짜기 사이에 외딴섬처럼 솟은 언덕 위에 조성되었다. 구도심은 지대가 더 높은 라구사 수페리오레(Ragusa Superiore)와 상대적으로 저지대인 라구사 이블라(Ragusa Ibla)로 이루어져 있다. 구도심은 깊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신도시와 연결되어 있으며, 구도심 안은 경사진 비탈을 따라 가파른 계단과 미로 같은 골목길로 서로 이어져 있다. 왜 이런 불편한 지형에 마을을 조성했을까? 유럽 중세 시절 지중해 연안은 사라센 해적의 노략질에 시달렸다. 해안은 물론이고 내륙조차도 해적의 침공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계곡 너머 평지를 두고 굳이 이런 불편한 산등성이 비탈길에 도시를 조성한 데는 불안정한 환경에 적응해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옛 라구사 인들의 애환이 진하게 깔려 있다. 이처럼 위험과 불편함의 대명사였던 산비탈 시가지가 현대에 오면서 각광받는 관광지로 떠올랐다는 사실은 세월의 변화가 가져다준 역설이다.
흥분과 긴장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 마을 답사에 나섰다. 작은 지도 한 장만 들고 골목길을 헤매다 보니 조금 전의 경탄은 물정 모르는 외부인의 낭만적 감상이었음을 곧 깨달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과 계단,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거친 숨을 내쉬면서 걷다 보니 마치 산악 훈련에 나선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역시 거실에 편안히 앉아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가는 여행이 가장 편한 방도이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시라쿠사의 고즈넉한 저녁 산책길이 떠올랐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지도를 포기하고 마음 가는 대로 골목길을 천천히 헤매면서 마음은 좀 더 편안해졌다. 어차피 라구사 구도심에는 꼭 봐야만 하는 유적도 정해진 경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과 발길 닿는 대로 미로 같은 골목을 표류하는 게 라구사의 여행법이다.
라구사에서는 계획이나 지도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세 시절처럼 느릿하게 돌아가는 라구사의 시계에 맞춰 내 몸과 마음도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마을 같은 곳이 바로 라구사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가까운 부산 바다에만 가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시간을 잘게 쪼개 바삐 사는 나의 삶이 비정상일까, 느리고 엉망이면서도 쉴 거 다 쉬며 느긋하게 즐기며 사는 이곳 사람들이 정상일까? 원래 계획은 내일 하루 라구사 인근의 소도시 모디카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모디카는 노토와 마찬가지로 17세기 대지진 후 세워진 여덟 군데 바로크 도시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일요일엔 시외버스도 시내버스도 다 끊긴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알게 됐다. 졸지에 하루가 더 공백으로 남게 된 것이다. 시칠리아에서는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더니 틀린 말이 없었다. 하지만 포기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모양이다. 내일은 진짜 가까운 골목길이나 산책하며 모처럼 여유나 부려야겠다며 마음을 바꿔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