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16] 라구사에서 빈둥거리며 보내기
낯선 도시라서 그런지 새벽같이 눈을 떴다. 테라스로 나가보니 새벽 공기는 아직 찬데 멀리 하늘이 붉어지면서 점차 뿌옇게 밝아온다.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일요일에는 모든 게 정지한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마치 정지 화면 같아 오히려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인적이 끊긴 거리엔 동네 마트까지 모두 문을 닫았고, 성당 종소리만 이른 아침의 정적을 깨뜨리며 울려 퍼질 뿐이다.
숙소 주인이 아침 식사를 쟁반에 담아 방에까지 가져다주었다. 빵 세 개와 포도 몇 알, 작은 커피잔이 전부이지만 시칠리아의 아침 식사로는 최고의 진수성찬이다. 시칠리아에 온 후 아침 식사는 늘 카푸치노와 크로와상 한 조각이 전부였다. 따뜻한 커피의 감촉과 향이 아직 덜 깬 오감을 자극한다. 테라스로 나가 떠오르는 햇살을 음미하면서 먹을까 생각했다. 근데 새벽 공기가 너무 쌀쌀해 사진만 찍고 안락한 방 안으로 철수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현재 기온이 15도다. 이곳이 낮이면 한여름의 열기를 뿜어내는 동네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마을이 500여 미터 정도의 고지대에 있어 일교차가 크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베란다에 빨래를 널어두면 잘 마르겠다는 현실적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늘은 시칠리아 주민처럼 일요일을 지내기로 한 날이다. 몸이 그렇게 하라고 시킨다. 머리로는 여유 있게 움직였다고 생각하는데, 몸은 그동안 무리했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일요일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원래 인근의 더 작은 도시인 모디카에 다녀올 계획이었으나 일요일에는 모든 대중교통이 중단되어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그 대신 두오모 광장의 작은 가게에서 모디카 특산품인 초콜릿 몇 개를 사서 허탈함을 달랬다.
모처럼 하루종일 빈둥거리면서 시칠리아의 휴일을 보내기로 작심하고 나자 왠지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런데 계획이란 늘 절반 정도만 실현된다고 했던가? 시칠리아의 휴일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침대에서 폰질을 하면서 늘어져 있는데, 한 시쯤 됐을까? 요란한 청소기 소리와 더불어 인기척이 있어 내다보니 마음씨 좋게 생긴 젊은 아줌마가 뭐라고 이야기한다. 빠른 이탈리아어로 끝없이 쏘아대는 데 내용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뭐 안 봐도 비디오다. 요지는 빈둥거리지 말고 나갔다 오라는 거다. 어째 나이와 무관하게 이럴 때 여자들은 모두 엄마 같은지 모르겠다.
일요일의 소도시는 평소보다 더 한적했다. 점심을 해결하려고 고지대인 라구사 슈페리오레 구역을 어슬렁거렸다. 식당도 문을 연 데가 몇 안 보였다. 거대한 지오반니 성당 광장 주변에는 관광객 풍의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문을 연 식당 중에서 그나마 좀 덜 관광객스러운 주택가 뒷골목의 식당을 선택해 자리를 잡았다. 근데 양쪽 테이블 손님들이 대화하고 있는데, 큰 목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시칠리아에 온 후 왠지 모르게 지형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내 고향 부산과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산비탈에 들어선 건물만 비슷한 게 아니었다. 안초비 스파게티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멸치 비빔국수를 하나 주문해서 후딱 비우고 식당을 나왔다. 평소와 달리 식후에 에스프레소까지 시키는 여유를 부렸는데도 식사를 마치는 데 얼마 안 걸렸다. 이럴 때는 홀로 여행자의 외로움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된다.
밥도 먹었으니 주변을 좀 더 여유 있게 살펴보기로 했다. 숙소가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내려가는 언저리에 있는지라 비탈을 따라 내려가며 좀 더 찬찬히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계단 대신 거의 U로 굽이굽이 휘어진 산복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비슷한 장소인데도 어제 못 본 곳과 새로운 면모가 눈에 들어왔다. 구시가지에서 저지대와 고지대가 만나는 계단 부근 공화국 광장에 있는 푸르가토리 성당에도 들어가 봤다. 텅 빈 성당에는 미사 준비 중인 듯 오르간 연주의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어 마음이 숙연해졌다. 보기에는 자그마해도 17세기 대지진을 버텨낸 유서 깊은 성당이라고 했다. 시칠리아 동부 지역의 도시들은 모두 대지진의 가슴 아픈 경험이 집단 기억 속에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듯했다.
잠시 산책하는 정도로 계획했던 나들이가 좀 길어졌다. 유서 깊은 성당과 가게도 기웃거리고, 이블라 구역 끝까지 걸어가 혼자 젤라토도 먹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어진다. 이블라 지역에도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여기저기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자기 기운이 떨어지면서 공기가 쌀쌀해졌다. 여행이 중반에 달하고 하루 중 이맘때면 혼자라는 쓸쓸한 느낌이 유독 강해진다.
뭔가 뜨끈한 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 지도를 뒤져 숙소 가까운 곳에서 중국 음식섬을 한 군데 찾아냈다. 저녁 시간인데도 텅 빈 홀을 지키던 여주인이 반색을 하고 손님을 맞는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아주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으나 오래간만에 종류별로 시켜 배불리 먹었더니 마음과 배가 모두 포근해진 느낌이다. 식당을 나서자 주방에 있던 주인이 손을 흔들어준다. 내일은 또 새로 길을 떠나야 한다. 이제 시칠리아에서 마지막 체류지인 카타니아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