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에 왔으니 에트나 화산을 일정에서 빼놓을 순 없다. 시칠리아 동부 어디를 가든 저 멀리 3350미터의 높이로 완만하게 펼쳐지면서 스카이라인을 압도하는 에트나 산을 볼 수 있다. 에트나 산은 그리스 신화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여러 무시무시한 괴물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티폰’이라는 괴물이었다. 제우스 신이 이 괴물과 싸워 마침내 산속 깊숙이 가둬두는 데 성공했는데, 거기가 바로 에트나 산이라는 것이다.
에트나 화산은 지금도 활동하는 활화산이다. 역사상 여러 차례 대폭발을 했을 뿐 아니라 가까이로는 2018년 폭발과 함께 엄청난 양의 용암을 뿜어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시칠리아 동부 도시에는 17세기 바로크 시대 이후의 건축이 많은데, 이 역시 1683년 일어난 에트나 화산 분출과 지진이 그 지역에서 이전 문명의 흔적을 거의 지워버리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도착하기 몇 달 전에도 뉴스에 화산 폭발 경보가 떴다. 이러한 화산 활동에 대한 공포는 고대 그리스인에게 이글거리는 땅 속에서 몸부림치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근데 여행이 2주를 넘어가자 몸이 고단해지면서 슬슬 게으름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화산은 지질학적 지각 변동의 산물이라 접근하기 까다로운 곳에 있으면서도 평범한 사람에게 인상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기 쉽지 않다.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얼마 동안 고민했으나, 내 생애 언제 시칠리아에 다시 오겠냐 하는 현실론에 넘어가 결국 가보기로 했다.
화산을 오르려면 케이블 카와 사윤구동 차량으로 갈아 타야 한다.
일단 가보기로 결정은 내렸지만 교통편이 문제였다. 에트나에 가는 교통편은 단체 투어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래서 두오모 광장 부근에서 열심히 판촉 중인 여행사 중 한 군데에서 하루 투어 티켓을 구매하고 말았다. 여행사 일정에 따르면 광장에서 출발해 에트나 산 해발 2000미터 높이까지는 여행사 버스로 움직이고, 2500미터까지는 케이블카로, 그다음은 비포장 산길을 4륜구동으로 간다고 되어 있다. 마지막 구간은 걸어서 올라가 볼 만도 한데, 그렇게 되면 돌아올 시간 맞추기가 아슬아슬하다.
화산을 둘러싸고 형성된 이야깃거리는 풍부할지 몰라도, 눈으로 보는 화산 지대는 사실 아파트 재건축 공사장 비슷한 분위기의 황량한 흙더미에 불과할 뿐 볼거리는 별로 없다. 단체 버스는 에트나 산 등성이의 도로를 오르면서, 2018년 용암이 휩쓸면서 형성된 폐허 자리에 군데군데 들러 사진 찍을 기회를 주곤 했다. 승객들은 종점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려 케이블카로 갈아탔다. 여기서 산 정상으로 가는 사륜구동 차량에 탑승했는데, 차는 얼마 안 가 멈췄다. 높이로는 해발 2750미터 지점이었는데, 사실 케이블카 하차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에트나 산의 무수한 칼데라 중 하나와 주변 지형
2018년 화산 분출 때 용암이 휩쓸고 간 자리는 아직 황량한 흙더미 상태로 있다.
현장 가이드는 멀리 산 밑을 내려다보면서 칼데라가 어떻고 용암이 어떻고 하며 지질학 강의만 열심히 늘어놓았다. 그리고 에트나 주변에 형성된 300개의 작은 칼데라 중 하나에 올라 분화구 언저리를 돌아보는 게 투어의 끝이었다. 저 위로는 아직 올라가 보지 못한 산 봉우리 위로 간간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역사적 지식과 지질학으로 접하는 화산 투어는 사실 졸음 유발에 최적일 정도로 지루했다. 오늘 투어에 따라나선 것을 잠시 후회했다.
사실 나는 이전에 여러 차례 화산 구경을 해본 적이 있다. 그중에는 백두산이나 미국 서부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러 화산처럼 이제는 활동을 거의 멈춘 곳도 있고, 일본 홋카이도의 노보리벳츠 계곡 화산지대나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브로모 화산처럼 지금도 연기와 유황 냄새를 내뿜는 곳도 있었다. 특히 브로모 화산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화산재가 쌓여 형성된 넓은 사막 같은 벌판 한가운데 높은 모래산 같은 활화산이 서 있었는데, 나는 연기를 내뿜고 있는 분화구 언저리까지 올라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커다란 구멍 속을 내려다봤다. 연기는 물론이고 분화구 깊숙이에서 올라오는 그르릉거리는 소리는 공포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한겨울에 가본 홋가이도의 노보리벳츠 화산 체험은 코를 찌르는 듯한 강렬한 유황 냄새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다른 화산 투어는 이처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역사와 지질학 강의로 대체하는 곳은 지금까지 별로 없었다.
어느 정도 고도가 올라가면 주변의 환경이 급격하게 바뀐다. 수목지대가 풀밭으로, 다시 이끼 지대로, 그 다음엔 화성 같은 황량한 사막 풍경으로 모습을 바꾼다.
새로운 경험은 늘 이전의 비슷한 다른 경험을 불러와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 에트나가 나에게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던 것은 이전의 더 극적인 경험과 비교 대상이 되면서 맥이 빠지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화산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에트나도 잊지 못할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교통편만 제공하는 하루 투어 치고는 비용이 너무 비쌌다는 점도 마치 바가지를 쓴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데 보탬이 됐을 것이다. 화산 지각 활동에 관한 지질학 강의를 듣는 데 이런저런 티켓 비용으로만 이미 100유로 넘게 날렸기 때문이다.
쓰라린 마음을 안고 카타니아로 돌아오니 도심의 광장 주변 건물 위로 붉은 노을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두오모 광장은 어둠이 깔리는 가운데 가로등 불빛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인근의 수산시장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시장 내부를 어슬렁거리다 한적한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에 해물특선으로 적혀 있길래 골랐는데, 일종의 모둠회가 나왔다. 유럽에서도 회를 먹는다는 사실은 전혀 새로운 발견이었다. 때로는 여행에서는 사전 지식과 경험을 무시하고 이전의 틀에서 벗어나 보는 것이 경험을 쌓는 데는 역시 유익한 모양이다.
수산시장의 저녁 메뉴는 모둠 해물이었다. 이탈리아와 한국 음식의 조리 감각이 유사함을 다시 한번 확인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