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간의 시칠리아 방랑을 마치고 이탈리아 본토로 가는 날이다. 떠나는 날은 출발 시간이 이르든 늦든 늘 하루 종일 어수선하다. 어차피 중요 일정은 마쳤고 그다지 시급한 일도 없는데 무리하지 않고 현명하게 시간을 잘 때우는 게 마지막 날에 할 일이다. 오늘은 인파로 넘쳐나는 도심을 벗어나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는 곳, 방문자가 적은 곳을 최대한 느린 템포로 다녀보기로 했다.
우선 숙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스테시로코 광장 부근에 로마 원형경기장이 있다고 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분명 지도에 표시된 지점에 도착했는데, 경기장을 연상시키는 건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울타리가 둘러쳐진 공터 아래로 무슨 폐허 비슷한 곳이 눈에 띈다. 한때 원형경기장이 있던 자리에서 거대한 건축물은 거의 다 사라지고 일부 기둥과 토대만 반지하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원형경기장처럼 존재감이 큰 유적이 가이드북에 표시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석재는 거의 검은색이었는데, 아마 세월 탓만은 아니라 석재 자체의 색깔이 그랬던 것 같다. 카타니아 인근에 에트나 화산지대가 있으니 검은 화산석이 가장 조달하기 쉬운 자재였던 게 당연하다.
스테시로코 광장 가운데는 로마 시대의 원형경기장 터가 있고, 양쪽에는 성 아가사 성당과 벨리니 동상이 서 있다.
널찍한 경기장 터 주변에는 광장과 시장이 있고, 그 주변에 상당히 큰 건물들이 여러 있었다. 원형 경기장 터를 중심으로 한쪽으로는 성 아가타 성당이 있고, 반대편 광장 쪽에는 빈센조 벨리니의 동상이 서 있었다. 여성 성인을 숭배하는 시칠리안 인들의 관습을 보여주듯, 카타니아 시내에는 성 아가타의 이름을 딴 성당이 여러 군데 있다. 근데 카타니아가 이 최고의 요지에 기억하기 위해 광장 중심에 세운 기념물의 주인공이 위대한 왕이나 장군도 아니고 음악가라니, 과연 이탈리아인 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시칠리아 땅을 휘몰아친 수천 년의 굴곡 어린 역사는 작은 기념물 형태로 압축되어 주변의 시장이나 건물과 부대끼며 공존하고 있었다.
광장에서 서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얼마 안 가 또 다른 성 아가사 성당이 나왔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베네디토 수도원과 성당이 있는데 그 주변에서는 꽤 볼 만한 곳이라고 들었다. 몇 군데 성당과 한적한 주택가 골목길을 곁눈질하며 걸어가다 보니 점차 오가는 행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높다란 나무가 서 있는 어수선한 주택가 한복판 공터에 짓다가 만 듯한 거대한 건축물이 나타났다. 성당이 분명한 듯한데 전면에 열주 기둥이 그대로 서 있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로마나 이집트의 신전 같다. 바로 뒤에는 수도원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미완공 신전풍의 성베네디토 수도원 성당
근데 이 성당 주변에는 성직자는 보이지 않고 학생 차림의 젊은이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유독 많이 보였다. 지나가는 여학생을 붙잡고 물어보니 여기가 카타니아대학교 인문사회 캠퍼스란다. 그러고 보니 학생들은 상당히 고풍스럽고 운치 있는 장소에서 대학 생활을 보내는 듯했다. 캠퍼스 입구와 마당엔 고대 로마 시절의 목욕탕 유적이 있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크 풍의 화려한 장식이 계단과 복도 천장을 뒤덮고 있었다. 옛 수도원 풍의 건물 한가운데에는 사각형 뜰이 있고, 그 주변을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데, 학생들은 뜰을 내다보면서 각자 편안한 자세로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학생들과 부대끼던 시절의 기억이 문득 새록새록 떠올랐다. 복도를 지나다가 문이 열린 대형강의실이 있어 흘낏 들여다보니 강의실 천정에는 커다란 프레스코화가 방 전체를 굽어보고 있었다.
이 고풍스러운 수도원은 카타니아대학교 캠퍼스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와 학문, 젊음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공간.
수도원이 학생들의 공간으로 전용되면서 어수선하고 지저분한 낙서로 얼룩진 곳도 일부 있었다. 그렇지만 유적이 생명을 멈추고 박제된 채로 보존 대상으로만 남지 않고 현재도 좋은 용도로 사용되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다. 줄 쳐놓고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식으로 관리의 편의 위주로 유적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에겐 반드시 잔디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거다. 학문과 진리는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만 꽃피울 수 있다고들 한다. 자유에는 약간의 위험과 신경 거슬림이라는 대가가 따르긴 하지만, 뭔가 고귀한 것을 얻는 데 드는 비용으로는 미미한 액수에 불과하다.
캠퍼스 부근의 식당은 푸짐하고 저렴했다. 넉살좋은 주인장의 호객에 넘어가 때아닌 풀코스로 포식을 했다.
고풍스러운 캠퍼스에서 기웃거리고 쉬고 먹고 마시며 여유를 부리는 동안, 출발의 시간이 다가왔다. 숙소에서 짐을 챙겨 버스 터미널로 서둘러 이동했다. 막 떠나려는 버스를 잡아타니 이제 드디어 시칠리아를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까지는 싱겁게도 10분이 채 안 걸렸다. 짐을 부치고 게이트를 찾아갈 때만 해도, 시칠리아와 이별은 싱거울 정도로 순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출발시간이 공식적으로 40분 연기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공식적으로만 그랬다. 그 후에도 비공식적인 지연, 이유 없는 기다림이 이어지고 또 한차례의 공식적 연기가 선포되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 비행기는 카타니아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이탈리아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대로 시칠리아에서 보낸 시간은 유독 인상 깊었고, 그만큼 이별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난관은 상상하지 못했다. 코로나의 암흑시대가 끝나고 다시 무지막지한 저가항공에 시달리는 여행의 시대가 되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떠날 때까지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카타니아여, 시칠리아여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