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여행 1]
다시 집을 나선 날 아침에는 찌푸린 하늘에 비만 뿌렸다. 코로나가 언제였는지 잊어버린 듯, 김해 공항 국제선 청사는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듯했다. 비행기가 구름 위로 솟아오르자 푸른 하늘 사이로 강렬한 햇살에 눈이 부시다. 오래전 이 바로 느낌 때문에 비행을 좋아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여행의 이력이 길어지면서 이제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거치는 의례로만 여길 정도로 시들해졌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무슨 일이든 처음이 그리고 젊음이란 참 소중한 것이다.
도착지 쿠알라룸푸르에서 다음 행선지인 보르네오섬의 산다칸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공항 인근에 하룻밤 숙소를 잡았다. 편도 무료 픽업을 제공한다고 해서 숙소 주인에게 메일을 보냈더니 터미널로 마중을 나왔다. 서툴긴 해도 영어가 조금 통하는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족과 함께 이전에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다는데, 남이섬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한류붐을 타고 드라마 촬영지를 다닌 듯했다. 차는 한적한 시골 마을 분위기의 동네로 접어들더니 마당이 있는 단층집 앞에 선다. 예약 사이트에서 화면으로는 그럴듯해 보였는데 막상 와보니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완전 외딴 마을 민박집이었다. 뜰에서 들어가는 별채 문을 열자 더운 열기가 확 느껴졌다.
내일 항공편 출발이 오후로 연기되는 바람에 꽤 긴 시간을 때워야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이 시골 마을에서는 할 일이 전혀 없다. 교통이 불편하니 멀리 갈 수도 없다. 원래 항공일정은 이른 시간 출발이라 공항 주변에 숙소를 잡은 건데, 왜 숙소를 변경하지 않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이제는 여행 계획을 관리하는 데서도 게으름이 타성화해버렸나 보다.
어쨌든 요기할 곳을 찾으러 마을을 둘러보았다. 집을 나서자마자 열대 특유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을 엄습한다. 구글 지도를 보니 주변에 식당이 몇 군데 찍히긴 했는데, 문을 연 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 가까운 동네 사람들이 낮시간에 요기하는 장소로 저녁에는 영업을 안 하는 모양이다. 사람이 보이길래 한 군데에 그냥 들어갔다. 딱히 식당이라 부르기도 애매할 정도로 시골집에 야외 테이블 두어 개를 내놓은 가게였다. 이제 막 문을 닫은 듯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아주머니가 나와서 앉으라고 하더니 기본적인 메뉴라도 괜찮은지 물어본 후 음식을 내온다.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흔히 만나는 닭고기와 쌀밥이었다.
식탁 주위에 자매인 두 아주머니와 어린 아들까지 앉아 밥을 먹는 동안 기이한 대화가 시작됐다. 한국 여행으로 서울과 남이섬 다녀온 이야기, 겨울연가부터 드라마, 음식까지 한국이 주 화젯거리였다. 한 아주머니는 자신의 생애 두 번째 여행지가 한국이라고 했다. 첫 여행지는 무슬림의 평생 의무인 메카였다. 그리고는 내가 어쩌다가 이처럼 외딴곳에 숙소를 잡게 되었는지 궁금해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참 기이한 인연도 많이 경험한다. 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도 종종 만나게 된다. 계획한 일정이 일그러지거나 아주 우연하게 엉뚱한 곳에 발을 디뎌 새로운 만남을 경험하기도 한다. 사실 낯선 나라의 사람과 대화를 시작할 때는 무엇보다 피부색과 나라로 첫인상을 판단한다. 아마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대화의 물꼬를 뜨는 계기나 호기심 거리가 되었을지 모른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생애 두세 번째 여행지로 한국을 선택한 이들에게 한국이란 단순히 호기심거리를 넘어 어떤 존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