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는 우리를 멈추게 하고, 시작은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퇴근길 산책 구간에서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그는 내 명의의 부동산을 처음으로 소유하게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십이삼 년 전, 일 때문에 알게 된 자산가로 지금은 70대가 되어 당시보다 생기가 다소 덜한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그때와 똑같은(아마 같은 제품일 듯하다) 그분 특유의 모자를 보자 단박에 그분임을 알아차렸다. 퇴근길 산책 구간은 반드시 혼자 고립되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일부러 말을 건네지는 않았지만, 반가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모두의 기억에 그는 부동산 자산가로 외모에서부터 특유의 짠내가 풍기는 까다로운 고객이었다. 수십억대 부자면서도 항상 같은 옷과 같은 모자, 그리고 습관적으로 묻는 "최저 금리는 얼마야?"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나를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그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였다.
결혼이라는 중요한 또 하나의 인생 과제를 막 시작한 시점이었고, 업무에 있어서도 대리라는 직급만큼 겨우 자기 몫을 해가던 근근한 시기였기에, 딱히 부동산 투자에 대한 목표나 관심은 당연히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장시간 풀어대던 삶과 부동산에 대한 일장연설은 나름 흥미로웠고, 나는 그의 인생 서사를 진지하고 인내심 있게 매번 경청해 주었다.
그런 관계 형성 덕분인지 그는 나에게 상암동의 신축 분양 오피스텔 청약을 끈질기게 권유했고, 마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아무 준비가 없었으나 엉겁결에 나는 오피스텔 하나를 분양받았다.
청약을 하고, 당첨이 되고, 계약금을 넣고, 잔금을 치르는 등 모든 복잡한 프로세스를 겪은 후 내 명의의 등기권리증, 소위 집문서를 손에 처음 쥐었을 때의 그 마음은 지금도 어떤 단어로도 형언할 수가 없다. 완공 후, 처음으로 새집 냄새 가득한 내 오피스텔 공간을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디디고 섰을 때, 나는 성공의 기쁨을 느꼈다.
돌아보면 작은 금액의 투자였고 그다지 성공적인 투자는 아니었으나, 그 경험은 부자라는 나의 위대한 꿈의 시작점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5번의 부동산 매매 경험을 삶의 커리어에 추가했고, 객관적인 수준의 부자는 아니지만 10년 전에는 꿈도 못 꿀 수준의 부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나의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종잣돈이라는 배경도 혹은 부유한 부모라는 배경도 없었으나, 삶의 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부자 어른의 호의 덕분에 부동산 투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시작점은 결국 나를 지금 이곳까지 데려왔다.
배경이라는 핑계보다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핑계는 우리를 멈추게 하고 시작은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그동안 먹고사는 게 치열하다는 핑계로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도 잊고 산 것 같다. 국내 복귀라는 큰 이벤트와 멀고 낯선 동네로의 발령, 어찌 보면 시련 같아 보이는 이런 일들은 삶이라는 친절한 신이 고마운 사람들을 잊고 사는 나의 무딘 마음에 주는 따뜻한 핫팩 같은 선물은 아닐까?
다음에 다시 그분을 우연히 만난다면, 따뜻한 차 한잔 대접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