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이 깊어야 샘이 마르지 않는다
긴 연휴를 앞둔 명절 전이라 그런지 일도 마음도 바쁘다. 직장인에게 바쁘다는 것은 물리적 시간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건 곧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사무실 이곳저곳에서 날 선 언어들이 평소보다 늘어난 것으로 느껴지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큰 특징 중 하나는 여유이다. 사실 나는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말도 행동도 걸음걸이도 느리다는 소리를 요즘 자주 듣는 것을 보니 일반적인 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 빠르지는 않은 것 같다. 엊그제는 출근길에 지하철역에서, 같이 근무하는 여직원을 만났는데 거의 축지법 수준의 빠른 걸음걸이를 구사하는 그녀를 쫓아가다 결국 포기하고 따로 갔다. 그녀는 같은 목적지를 가는 동료에게 먼저 가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크게 웃었다.
반면에 나는 사람들의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며, 빠른 템포로는 삶을 자세히 관찰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러 느림을 지향하기도 한다. 나의 느림은 운전에서 극에 달하는데 나는 운전하는 내내 봐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매일 변하는 거리 풍경에서 오늘은 무엇이 바뀌었는지 찾아내야 하고, 웃으며 걷는 사람들의 숫자가 어제보다 늘었는지 봐야 하고, 앞차가 세차할 때가 된 건 아닌지도 봐야 한다. 그래서 아내는 내가 산만하고 느리다는 핀잔을 자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운전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이렇게 느린 나의 눈에는 사람들이 경주하듯 뛰어다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매일 이용하는 9호선 지하철 환승 구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뛴다. 가뜩이나 길고 가파른 에스컬레이터를 마치 좀비 떼가 달려들 듯 뛰어 내려와 움찔할 때가 여러 번이다. 진심으로 넘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좀처럼 뛰는 일이 없는 나에게 매번 저렇게 뛰는 광경은 볼 때마다 낯설다.
나도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업무적으로 끔찍하게
바쁘던 시절, 여유는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있다. 그런 탓에 일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그럴수록 선배라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가혹하게 채찍질당하고 빠르게 달리기를 강요당했다. 어쩌면 예외 없이 다들 하나같이 똑같이 후배들을 지독하게 부려 먹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아마 그것이 그 당시의 기업 문화였던 것 같다.
나는 절대 우리 선배들처럼 조급하고 후배들을 부려 먹고 가끔 비겁하기도 하면서 계산적으로 사는 멋없는 선배는 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고 아직까지는 그 다짐이 잘 이행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시대가 조금은 변해 오히려 일을 넘기는 후배들도 종종 만나게 되어 격세지감을 느낀다. 기습적으로 나온 본점 정기 감사와 명절 전 분주한 시기가 겹쳐 일이 많아진 데다, 발령으로 이동한 팀원이 넘겨주고 간 일을 처리하느라 요즘 일이 바빴던 것이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팀장에게 주고 간 전 팀원의 패기는 높게 살 만하다. 그래도 미진했던 일을 내 손으로 매듭짓고 나니 마음이 가볍고 경쾌한 장점도 나름 있다.
바쁜 시간들이 다시 닥쳐올 때마다 예전의 여유 없던 때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몸이 기억해 평정심을 잃을 뻔할 때가 요즘도 종종 있다. 다행히 그간 수없이 연습했던 여유와 침착함이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나 스스로를 다잡으면, 이내 평정심을 되찾곤 한다. 현명한 친구가 강조한 그릇이 조금 커진 것 같아 뿌듯함을 느낀다. 우물이 깊어야 샘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나는 여전히 여유라는 내 안의 우물을 더 깊게 파고 있는 중이다. 필요한 일만 꼭 찾아 하는 후배에게, 필요가 덜 한 일쯤은 쿨하게 받아 처리해 주는 여유는 결국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다시 깨닫는다.
팀원들에게 버릇처럼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너무 빠르지 않아도 괜찮고, 오늘 뭔가를 반드시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으니 쉬어가며 차근차근 일을 해도 된다는 말이다. 나는 왼손 인대가 끊어져 병원에 입원해서도 오른팔은 멀쩡하니 와서 일을 거들라는 선배의 강요에 입원복을 입고 와서 일을 하던 경험이 있을지언정, 후배들에게는 이왕이면 좋은 경험만 주고 싶다. 그래서 그들이 회사를 덜 끔찍한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진부한 얘기지만 물컵에 반이 차 있는 물을 아직도 반이라고 생각하는 마음과 겨우 반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내 마음에 있는 필터에 따른 다른 관점일 것이다. 연휴도 마찬가지다. 마음먹기에 따라 5일이 짧을 수도 있고 또 반대로 길 수도 있다. 다행히 나에게는 아마 긴 연휴가 될 것 같다.
빠르고 복잡한 세상이라 마음을 편안하게 먹기가 어렵겠지만, 이번 명절만큼은 많은 이들이 달리지 않고 넉넉하고 여유 있는 명절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