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3. 사라진 밀크티와 유통기한의 수호자

당연하지 않은 당위성, 공용 냉장고

by 구십구 퍼센트 E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대개 거창한 명분으로 시작되지만, 리테일 현장의 비극은 대개 500ml 용량의 플라스틱 통 안에서 시작된다. 나에게 있어 오후의 밀크티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그것은 99%의 외향성(E)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혈중 당도를 조절하는 ‘생명 유지 장치’이자, 시스템 없는 현장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합법적 일탈이다.

그날도 그랬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그 고통스러운 결정 장애의 시간을 견뎌낸 건, 매장 냉장고 구석에 고이 모셔둔 밀크티가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굣길을 즐겁게 해주는 냉장고 안 보물처럼.

하지만 냉장고 문을 연 순간, 나는 현대 물리학이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과 마주했다. 분명히 존재해야 할 물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오빠가 먹어버린 나의 소중한 찰떡아이스처럼.

“그거, 어제 그분이 드셨는데요?”

동료의 한마디에 매장의 온도는 순식간에 영하 40도로 급강하했다. 비폭력 대화(NVC)를 공부하며 포용성을 실천해 온 나였지만, 내 소중한 당분을 가로챈 약탈 행위 앞에서는 간디조차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음 날, 범인(?)에게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예상치 못한 인류학적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아, 그거요? 유통기한이 지나서 상할까 봐 제가 대신 마셔버렸어요.”

세상에. 타인의 자산 가치가 하락할 것을 우려해 직접 자신의 위장으로 폐기 처분해 주었다는 이 눈물겨운 희생정신이라니. 그의 논리대로라면 길가에 세워진 남의 마세라티도 타이어 바람이 빠질까 봐 대신 운전해 주어야 마땅했다.

이 해괴망측한 사건 이후, 우리 매장의 냉장고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모든 음식물에 주인의 이름을 문신처럼 새겨 넣어야 하는 ‘식품 실명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럭셔리 매장의 우아함은 식빵 봉투 위에 휘갈겨 쓴 ‘홍길동’이라는 석 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것은 단순히 밀크티 한 병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의 영역과 선(Line)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어떻게 조직의 신뢰를 갉아먹는지 보여주는 서글픈 우화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의 냉장고를 열어보려 한다면 기억하라. 그 안에는 누군가의 ‘생존’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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