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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인티나인즈 Aug 21. 2019

선 너머의 선


내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본  초등학교 3학년의 여름 방학, 제주도에  때였다. 빠른 년생으로   학교에 일찍 들어가 아홉 살이었던 나는  나잇대 여자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밥상머리에서 온종일 미적거려 엄마의 화를 돋우는 삐쩍 마른 멸치 같은 아이였다. 우리 가족은 만장굴에 갔는데, 살갗이 타오르는 듯한 무더운 바깥 날씨와는 정반대로 동굴  계절은 초겨울이었다. 남색 바탕에 하얀 땡땡이가 그려진 민소매 셔츠와 3 반바지만  꺼풀 달랑 입은 데다가, 발등이 훤한 조리를 신고 있었으니 나에겐 더더욱 추운 겨울이었을 테다. 만장굴의 길이가  그대로 만장 같아서 아무리 걸어도 멈출  없을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 나를 급히 들춰업은  엄마였다. 차가워진 멸치를 등에 붙인 엄마는, 내가 신고 있던 조리를  양손에 들리고선 만장굴의  끝까지, 그리고 되돌아 만장굴을 벗어날 때까지 한참을 꺼칠하고 따듯한 손으로 나의 양쪽 발을 잡아 옆구리에 끼고 걸었다. 이제는 안전하다는 안도감, 엄마에게 선택받았다는 승리감, 엄마를 힘들게 했다는 약간의 미안함이 뒤섞인 연노랑의 감정이 나를 잔뜩 물들였다. 이후부터 나는 ‘어른으로 불리기 시작한 한참 뒤까지도, 어디에서든  온기가 필요할 때면  이때의 연노랑을 떠올리며 마음을 덥히곤 했다.     


애써 특별해지려고 하지 않아도,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하는 건 내가 해줄게, 너는 그저 보이는 것들의 경이를 감탄하고 받는 것들을 즐거이 누리면 된다고 엄마는 침묵으로 말했다. 그런 식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경험을 내가 다른 어디에서 얻을 수 있었을까. 이제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닌 나는 자연 속에라야 그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초록으로 누운 산맥 줄기를 볼 때마다 나는 마룻바닥에 누워 곤히 자던 주말 한낮의 엄마를 떠올리고,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져 우주와도 같아진 밤바다를 볼 때마다 나는 얼른 자라며 어둠 속에서도 두툼한 손으로 내 눈을 가리던 한밤중의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는 나를 품는 첫 자연, 첫 여신이었던 셈이다.     


열정과 희생이라는 찬란한 빛으로만 둘러싸여 있는 줄 알았던 엄마인데, 한편에는 늘 무겁고 서늘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다음이었다. 여러 번 점점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도, 가장 잘 살았던 때를 못내 그리워하며 차마 버리지 못한 고풍스러운 원목 식탁에 앉아 엄마는 조각조각 천을 기우듯, 드문드문한 말투로, 곤히 잠든 손녀를 깨우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나긋나긋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가 봐도 명철한 인재였던 막내아들이 데리고 온 배움 없는 며느리에게 그 시절 보통의 시댁 식구들이 했을 법한 미련하고 뻔뻔한 말과 행동들. 그러나 한 여자, 한 인간에게는 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던 시간들. 나름의 인내의 방법을 터득하며 견뎌냈던 순간순간마다,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고 되려 비수를 꽂아댔던 그녀의 남편. 그래서였다고, 엄마는 덤덤하게 말했다. 두 자식에게 모든 힘과 모든 마음과 모든 정을 이상하리만치 다 쏟아부었던 것은. 붙잡을 것이 나와 나의 오빠밖에 없었다고 했다. 내 편이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두 명쯤은 내 편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지만 엄마의 그 방법은 성공했던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녀의 그 아픈 시간을 들어줄 수도, 공감해줄 수도 없었던 내가 과연 그때 그녀의 편이 되어줬을까.   

  

지금 내 나이는 엄마가 네 살 난 딸을 키우던 나이와 같다. 그 무렵의 엄마는 내게 두어 개의 기억 조각을 꿰맨 단상으로 남아있다. 초등학교 시절의 엄마, 중고등학교 시절의 엄마, 대학교 시절의 엄마, 그리고 결혼 전의 엄마와 지금은 결혼 후의 엄마. 내가 자랄수록, 엄마의 시간의 뒤를 밟을수록, 나는 꼭 산등성이를 오르는 것만 같다. 등고선을 하나씩 넘으며.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시점이 사실은 단 하나의 등고선을 넘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산을 오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문득 지도를 확인해보면 나는 또 한 개의 등고선을 넘어서 있다. 그렇게 나는 계속 선 너머에 있는 선을 향해, ‘엄마’라는, ‘여자’라는, ‘인간’이라는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의 생을 추적해간다. 직선이 아닌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선을 넘을 때마다 수시로 변하는 산속 풍경을 감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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