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는 훈련

by 소방작가

이해를 할 수 있지만, 용서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이해를 한다면서 용서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이해를 위해 사건과 거기에 연관된 인물들을 톺아보는 과정에서 잘못을 덮어줄 수 없는 근거가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피해자의 생활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왜곡시키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길을 묘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사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일이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삶을 되찾기 위해서는 피의자에 대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해를 하고 나면 내가 미워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피의자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야 삶을 되찾는 길의 초입에 들어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섣부르게 용서하거나, 막연하게 분노하는 것은 피해자의 마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자신의 심상에 거짓된 감정을 심어 억울한 마음이 풀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만이 피해자가 삶의 손상을 극복하고, 제자리를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범죄를 다루는 책과 영화를 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는 훈련을 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그러한 점에서 좋은 교보재가 됩니다.


한의원에서 한 남성이 손목에 자해를 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지령서를 보며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왜 한의원에서 손목에 자해를 했던 것일까요. 현장에 도착해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남성은 한의원의 여자화장실에서 몰래카메라를 촬영하던 중, 피해 여성의 적극적인 조치로 한의원 관계자들에 의해 현행범으로 붙잡혀 빈 진료실에서 경찰이 도착하기를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피의자는 자신이 도주할 수 없게 되자 좌절하여 사무실 책상 위에 있던 커터칼을 이용하여 자신의 손목에 자해를 하였는데, 다행이 상처는 깊지 않아 단순 지혈 조치 및 드레싱만 하면 되는 상태였습니다. 피해자는 어설프게 불의와 화해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당당하게 지켰으나 누구나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이는 자신이 입은 범죄가 다른 피해자에게 번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피해 상황을 주변 사람들에게 고발하며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것이 현행범 체포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면 고발하는 과정에서 보복을 당할 위험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무실에서 피의자가 손에 쥔 커터칼을 자신을 해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피해자나 한의원 관계자를 공격하거나 위협하는 데 사용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러한 범죄 사건의 행정적 조연으로 참여해보니, 광장에서 첨예하게 격돌하는 성별 갈등이 있기 이전에 여성이 남성과 동일하게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다고 느낄 만한 사건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실존하는 위험임을 알았습니다. 사회 속에 숨어있는 포식자들에 의해 언제든지 여성이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주권자로서 당연한 요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피의자가 공중 화장실에서 몰래카매라를 불법 촬영하는 범죄적 망상을 현실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도덕적 제동 장치가 정지해버린 것이 주된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그동안 몇 번의 대담한 범행이 적발되지 않았거나, 피해자에 의해 적발되었더라도 신고하지 않으며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금지된 것이 성공하였을 때, 그것을 요행이라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범죄 실행의 첫 성공은 마음 놓고 다음 범행으로 이어지는 악마의 초대장이기에 그렇습니다.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작은 종말》 속 <가면>을 보면 작가의 직접적인 방백이 등장합니다.


"언제나 첫 한 번이 가장 강렬하다. 마약을 해본 사람들은 그 첫 한 방의 기억을 잊지 못해 되풀이해서 약을 찾다가 재산과 가족과 직장과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점점 더 많은 약으로 첫 한 방의 느낌을 재현하려 노력하다가 결국 약물 과용으로 죽는다. 도박을 해본 사람도 마찬가지로 첫 대박을 터뜨렸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하고 그 한 방을 찾아서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넣는다. ··· 자극의 내용이 무엇이 됐든, 도파민이 처음 뇌 속에 흘러넘쳤을 때의 쾌감은 보통의 인간이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넘어선다. 그 첫 한 번의 쾌감을 겪어본 뒤에도 알면서 의식적으로 거부할 수 있을 만큼 금욕적인 사람은 통계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쾌감을 좇아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 평생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어찌 보면 평범한 사람의 당연한 반응인 것이다. ···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당할 수 없는 쾌락과 평생 마주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 또한 행운아다."


실제로 소설 속 이야기처럼 금지된 쾌락을 좇는 사람들 중 마약을 복용한 사람을 몇 명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약에 취해 맨몸으로 우수관을 타고 오르거나 외계인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파괴된 채로 끊임 없이 쾌락의 허기를 채우기 위한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현행범 체포가 된 것은 당장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낄지라도 그들을 위해 그리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형사 제도에 의해 악습을 답습하는 개인이 멈춰설 수 있게 되기에 그렇습니다. 응급처치를 받은 청년은 경찰에 인계되는 과정에서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이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자각하는 듯 했습니다. 이제 그는 공무원과 같은 범죄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직업은 갖지 못할 것이며, 포렌식 결과에 따라 여죄가 드러난다면 실형을 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범죄를 저질렀으니 일정 기간 성범죄자 알리미에 등재되어 범죄자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되겠지만, 범행을 멈추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체포되는 것만이 자신의 미래를 지키는 합리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애초에 그런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이치에 맞지만 말입니다.


세상의 비극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상정하는 것처럼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학자 홍기빈 박사의 책 《위기 이후의 경제 철학》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나게 파티를 하려는 사람, 수술을 앞둔 사람에게 마취를 하려는 의사, 불면증을 호소하는 환자 모두에게 부합하는 하나의 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모르핀'입니다. 모르핀은 환각제, 마취제, 수면제로 사용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목적에 맞는 정량을 지켜야만 비극을 피할 수 있지만, 최대한 많은 양을 확보하려는 인간의 비합리성은 모르핀 중독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만약 청년도 일반적인 사람과 같이 건전하게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데서 멈출 수 있었다면,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수갑을 차는 일만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라 소설가의 지적처럼 "첫 한 번의 쾌감을 겪어본 뒤에도 알면서 의식적으로 거부할 수 있을 만큼 금욕적인 사람은 통계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이의 결말이 체포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이며, 체포 및 구금 만이 유일한 구원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여기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을 빚지고 있는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