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의해 쓰기를 잃지 않기 위하여

by 소방작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생성과 파괴가 교차하는 가운데 삶의 순환이 움직이지 않고 유지됩니다. 그러나 만약 심장이 멈추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체내의 산소 공급이 차단되어 폐순환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면 외부에서 흉골을 직접 압박하여 순환을 보조해야만 합니다. 외력을 가하여 힘을 전달해야 할 부위는 흉골 안쪽에 있는 심장이므로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힘으로 체중을 이용해 가슴을 힘껏 누르는 것이 방법입니다. 그러면 종종 두 손을 모아 가슴을 누르는 힘으로 가슴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고는 하는데, 와상 생활을 오래 한 만성질환자의 경우에는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았음에도 저항 없이 가슴뼈가 부러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병상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는 환자는 뼈의 밀도가 낮아지는 골다공증에 빠지기 쉬워서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뼈파괴세포’가 자극받아 조직의 밀도와 강도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신체의 다른 세포와 마찬가지로 뼈 역시 생성과 파괴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몸의 외골격을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부하를 겪는 빈도와 강도에 따라 단단한 정도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육을 쓰는 운동을 통해 뼈에 하중을 가하면 ‘뼈모세포’는 혈중의 칼슘을 더 많이 포집하여 강한 뼈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젊고 건강한 환자가 심정지 상태에 빠졌을 때 소생술을 실시하면 흉곽이 무너지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수렵채집을 하던 인류와 농경 생활을 하던 인류, 그리고 현대인의 뼈 밀도를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수렵채집인과 농경 생활인을 비교한 결과 농경 생활인의 해면골(뼈 내부에서 충격을 흡수하고 골수를 저장하는 조직) 밀도가 20%나 성기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수렵채집인의 뼈는 오랑우탄과 비슷한 수준으로 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농경 생활인과 현대인을 비교하니, 기원전 7,400-3,500년 초기 농경 여성의 상완골 강도는 격렬하게 노를 젓는 현대의 프로 조정 선수보다 11~16% 높았습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탄생과 동시에 붕괴하는 조직에서 생성하는 것이 사멸하는 것보다 많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향상된 모습을 바란다면 발전하고자 하는 부분이 자극될 수 있도록 부단하게 사용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면 ‘연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현대의 자본주의는 내부적 모순으로 인해 성장이 둔화하며 기업이 신규직원을 채용하지 않는 풍토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청년들이 공동체로부터 어떠한 역할도 부여받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적 책임을 견디는 능력이 퇴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은, 자본이 연습하는 인간을 비용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사회의 모든 분야를 의탁해야 하는데, 그들은 뼈가 단단해질 기회를 얻지 못해서 책임감에 짓눌리고 말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면 암울해지지만, 더욱 암담한 것은 이제 인간을 AI 기술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인공 신경망은 챗봇에게 무엇이든 물어보면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열어젖혔습니다. 따라서 숙의는 느리고 불필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민하지 않고도 손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손안에 있기에 때문입니다. AI가 잘하는 분야는 무수히 많지만, 인간의 고유한 기능 자체를 퇴화시킬 만한 장기는 서술하는 능력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작가 호레이스 월폴은 말합니다.

“나는 어떤 것을 써보기 전까지는 그것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한다.”

저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현재는 너무나 빠르게 휘발되기 때문에 과거의 순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글을 쓰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서술하는 과정을 통해 막연함을 밀어내고 관념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AI가 등장한 시대에 글쓰기에 관한 문제를 고찰한 나오미 배런의 책 《쓰기의 미래(AI라는 유혹적 글쓰기 도구의 등장, 그 이후)》 중 한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무엇이라 이해하든지 마음은 돌이켜보는 능력을 포함한다. 독서는 우리에게 단어들 사이에서 멈추고 생각하고 다시 읽을 기회를 준다. 쓰면서 우리는 쓸 뿐만 아니라 멈추고 생각하고 고쳐 쓸 기회를 얻는다.”

기계에 서술하는 능력을 의탁한 대가로 쓰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될 때, 인간은 멈추어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순간에 머무를 수 없는 인간은 돌이켜볼 수 없으므로 생각하고 고쳐 쓸 여유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연습할 수도, 성찰할 수도 없는 인간의 사유는 우주비행사의 뼈처럼 무르고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AI에 의존하는 인간에게 닥친 불행 중 하나는 생각의 약화와 더불어 경로의존에 따른 개성의 상실입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글은 김상욱 경희대 물라학과 교수의 <시사IN> 칼럼 “우리는 인공지능을 왜 개발하는가”입니다.

딥마인드가 알파고를 통해 바둑 쇼케이스를 하기 전에는 바둑 기사들에게 ‘기풍’이라는 것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둑 기사들 본인에게 기풍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해서는 제대로 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바둑 기사만의 예술성과 철학이라고 볼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바둑 기사들은 저마다 가진 기풍에 걸맞는 자신만의 묘수가 있다고 여겨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둑의 본령은 전투에서의 승패에 달려있습니다. 알파고가 인간이 기계를 상대로 수 싸움에서 앞설 수 없음을 증명하자, 바둑기사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기풍을 버리고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승리할 확률이 높은 수를 모방하여 바둑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딥마인드가 바둑에서 기풍의 종언을 고한 것입니다. 앞으로 사람들은 프로 바둑 기사처럼 기계적 계산 방식의 효율성에 따라 인간의 생활 양식을 개선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조지오웰의 소설 《1984》 속 ‘빅브라더’처럼 인공지능이 모든 일을 획일적으로 지도하게 되는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는 위기감을 자아냅니다. 기계에 의한 지배를 경제적이라고 수용하며 종래에는 AI를 따라 쓰는 소설가, AI를 따라 짓는 작곡가가 나오는 것도 어색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바둑 세계에서 상금을 놓고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것처럼, 직업적 예술가의 현실 역시 상업적 성공 없이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창한 기계 언어가 범람하는 시대에 작가 고유의 작풍이 사라진 능률적이고 매끈한 세계를 걱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느리고 비효율적이더라도 나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만년필을 들고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손으로 글을 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쓰는 것만이 내가 진정해지기 위한 연습과 다름없기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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