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데몬 헌터스> 다르게 보기

by 소방작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무력과 기예를 겸비한 3인조 걸그룹 '헌트릭스'가 악령을 퇴치하여 공동체의 안녕을 유지한다는 헐리우드의 통속적 문법을 따르는 히어로물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검과 환도, 수리검 같은 날카로운 병기(兵器)를 휘둘러 악령을 무찌르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아 '귀마'라고 불리는 사악한 마왕에게 제물로 바침으로써 존재의 소멸을 꾀하기 때문입니다. 귀마는 영혼을 보다 많이 흡수하여 자신의 힘을 더욱 강화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귀마는 저승사자를 매력적인 K팝 보이 그룹 '사자 보이즈'로 포장하여 죽음으로의 초대를 흡입력 있게 만듭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헌트릭스의 맴버 루미·미라·조이는 대대로 전승된 퇴마 의식을 춤과 안무로 계승하여 '혼문( 魂門)'이라는 공동체의 피부를 형성합니다. 피부는 보호막입니다. 단단한 각질층은 외부의 물리적 자극으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고, 피지선에서 분비되는 약산성 물질은 피지막을 이루어 세균·바이러스·곰팡이와 같은 병원체의 침입을 억제하여 면역체계를 유지합니다. 또한 피부는 몸 바깥에서 비롯된 충격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체내의 수분이 손실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도 합니다.


헌트릭스 목표는 명확합니다. K팝 공연을 통해 자신들의 음악적 영향력을 확장하여 공동체의 보호막(혼문)을 강화하고 사자 보이즈와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팬덤의 손실을 막아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그녀들은 피부처럼 공동체의 안과 바깥을 수호하며 이질적인 것의 개입이 불허된 무균적 세상를 도모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믿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단순한 도식적 구조는 헌트릭스의 리더 루미의 비밀이 드러나며 납작한 영화의 세계관을 비틀어 관객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루미의 피부에 악령의 무늬가 드러나게 됩니다. 극에서 자세히 부연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루미는 이전 세대 데몬 헌터였던 어머니와 악령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피부에 드러난 낙인을 숨기며 혼문을 짓는 활동을 강행합니다. 그래야 대중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아이돌로서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은 인물의 행실을 강제합니다. 루미가 자신의 특성을 은폐한 것은 불합리한 차별을 피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루미는 관객에게 묻습니다.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특징이 당신의 존재에 내재해 있다면, 그러한 모습을 솔직하게 공개할 수 있나요?"


우리말 속담에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운신을 위해서는 몸을 포용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기에 생긴 말일 것입니다. 누울 자리가 없다면 당연하게도 누워서 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소수자를 위해 누울 자리를 마련한 곳이었는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수자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위해서는 대중의 심리적 수용성을 높여 누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차별받고 미움받는 자가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악령 사냥꾼이지만, 악령이기도 한 루미라는 캐릭터는 외면받는 소수자의 자리를 넓혀 당당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루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전 세계의 소수자를 지키기 위한 혼문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드높은 문화의 힘은 완력으로 부술 수 없는 편견을 유연하게 회피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높아진 케이팝의 위상을 활용하여 소수자에 대한 용인과 환대에 대한 가치를 세련된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만약 영화의 서사 속에 심오한 철학적 고찰이 없었더라면 작품은 촌스러운 히어로물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되는 바는 주변에 상존하는 차별과 저항을 극복하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빛나겠다는 다짐입니다. 영화와 더불어 수록곡 <Golden>이 빌보드 차트에서 선전하는 것 역시 독립해야 할 사회적 압제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대중과 호응했다고 분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차별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중이 열광하는 곳에는 분명 결핍이 엄연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난 25년 9월 4일, 미국 이민세관단속국과 국토안보수사국이 조지아주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합작해서 운영하는 배터리공장에 헬기와 장갑차를 대동하여 공장 노동자 450여 명을 체포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한국인 300여 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미 정부 요원들은 체류 목적에 맞지 않는 비자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양손과 양발에 쇠고랑을 채워 연행하였는데,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더욱 가혹한 태도로 속박했다고 전해집니다. 미국은 제조업의 생태계가 무너졌으므로 위대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Make America Great Again, MAGA) 한국 대기업과 부품을 조달하는 협력업체의 기술 이전이 필수적입니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힘든 일을 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고 인건비가 비싼 데다가 노동자로서의 성실성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말에 미식축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다른 주로 이동하여 무단으로 사업체에 출근하지 않는 경우는 비교적 흔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조업은 생산라인을 효율적으로 구성하고 숙련된 인원을 제조 공정에 참여시켜야 투입한 자원 대비 얻은 양품의 비율을 우수하게 맞출 수 있습니다. 만든 물건에 조금이라도 오차가 발생하면 그 물건은 불량품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국 대기업과 협력업체의 숙련 노동자들이 미국 노동자들에게 작업 지도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미국의 작업비자 발급 요건이 비싸고 까다로운 데다가, 그것마저도 추첨으로 오랜 기간 기다린 끝에 발급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시 적소에 자원을 긴급하게 투입해야 하는 제조업 현장에서 이러한 미국의 비자 관리 제도는 우리 기업으로서는 큰 애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협력업체의 경우에는 원천적으로 작업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습니다. 한국이 6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감행함에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측에서 대대적으로 불법체류자에 관한 단속을 한 이유는 MAGA 지지자의 반이민정서를 자극하여 내년에 있을 의회 선거에서 우위에 서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론은 MAGA 정치인들의 기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대대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혐오 정서에 기대어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던 속셈은 완벽히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역 사회의 대규모 고용과 성장을 이끌어갈 공장의 설립을 멈춰 세웠는데, 미국인들은 스스로 제조업을 운영할 실력이 없습니다. 글로벌 자본시장은 동맹국에 가하는 부당한 처사를 지켜보고 대미 투자를 재고하게 될 것입니다. 혐오 정서를 바탕으로 정권을 탈환한 MAGA 진영으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주민을 추방하여 그들만의 낙원을 구축(構築)하려고 했는데, 현실에서 구축(驅逐)되는 것은 바로 본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극우적 사상이 갈파하는 것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이주민의 재능 없이는 그 무엇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 뉴스를 보고 지난날의 구급 출동이 생각났습니다. 신고자는 “마음이 아파요”라고 말하여 정신건강 관련 환자인 줄 알았는데, 막상 환자와 직접 접촉해 보니 팔꿈치 안쪽에 15cm가량의 심각한 열상이 관찰되었습니다. 손상 부위가 넓고, 감염의 우려가 있어 병원 진료를 권유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불법체류자라며 병원은 갈 수 없다고 했고, 의료용 바늘과 실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구급차 안에 바늘과 실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환자는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저를 도와줄 거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현장을 이탈했습니다. 그는 왜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음에도, 피부가 찢어졌음에도 왜 마음이 아프다고 했을까요? 우리 사회는 왜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모두가 기피하는 노동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음에도 그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을 보장하고 있지 않은 것일까요. 비자가 없거나 만료된 외국인 체류자라고 비난하기 이전에 사람의 목소리에 아무런 조건 없이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지 영화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Golden>의 노래 가사처럼 영원히 깨질 수 없는 자신다움이 황금빛으로 빛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슈퍼히어로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