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판데믹 기간 동안 구급차를 탔고, 엔데믹에 다시 화재 진압 대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올해, 오래간만에 구급대원으로 보직이 바뀌었는데, 다시 구급차를 타며 새삼스럽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느끼는 고통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의식이 없는 환자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언어로 밝힐 수 있는 환자들 역시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금 타인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할 만큼 극심하게 아프다는 자명한 진실을 타인에게 정확하게 설명할 언어가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시사 주간지에서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가 장안의 화제였던 넷플릭스 프로그램 <흑백요리사>를 보고 느낀 바를 썼던 칼럼을 읽은 적 있습니다. 맛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인 혀는 단맛, 쓴맛, 신맛, 짠맛, 감칠맛 다섯 가지만을 수용하는데, 각각의 음식마다 다섯가지 맛의 조합 이상으로 다채로운 맛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까닭은 바로 '후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코에는 무려 400여 종류의 후각세포가 있다. 아직 우리는 후각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후각은 묘사할 단어가 거의 없는 감각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억으로 되살리기도 힘들다. 눈 감고 어제 먹은 음식을 상상해보라. 눈앞에 음식을 그려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음식 냄새를 떠올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냄새는 기억에 저장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상태와 감정, 감각을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역설적으로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신체의 감각 수용체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부만을 분간할 수 있고, 분류해낸 것들 중 일부만을 겨우 언어로 이름 붙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상욱 교수가 맛과 후각의 상관 관계에서 말한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맛을 기억할 때 여러가지 후각적 기호가 혼합된 음식의 맛 그 자체보다는, 감각기관이 만족했던 감상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상욱 교수가 말한 것처럼, 냄새는 기억에 저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떨까요? 환자들이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말하지 못할 때면 같이 근무하는 응급구조사 동료가 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 지금 선생님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는 세상에서 선생님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아요. 선생님이 설명을 해주셔야 우리가 선생님을 수용할 수 있는 병원을 선정할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실제로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 환자가 정확히 표현할수 있는 능력이 생길리는 만무합니다. 일단, 아프다는 사실 그 자체가 환자를 압도하고 있기에 생각나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체의 통각이 어느 부분에서 생기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신체의 장기 중에는 피부와 근육, 뼈와 관절처럼 신경이 풍부해서 통증을 잘 느낄 수 있는 곳도 있는 반면에, 장기 내부의 압력 변화가 있거나 피막에 염증이 생겨야 겨우 둔한 통증을 느끼는 부분도 있습니다. 심지어 장기 중에는(간, 폐, 비장, 소장, 대장) 내부에 감각 신경이 거의 없어서 사실상 통증을 느낄 수 없는 곳도 있습니다. 병원에서 장기 내부를 절재하는 수술을 받아도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이유 역시 해당 부위에 통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환자가 자신의 신체적 고통을 타인에게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순간이 영겁 같은 통증 속에 놓여서 제대로 표현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구급대원은 환자에게서 파악한 질병 혹은 질병외 기전을 자세히 파악해야 의료진에게 환자를 인계할 수 있고, 그래야 의료진은 환자가 겪는 고통에 정확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자의 말을 적극적으로 청취하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환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는 어려운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꿍하는 것 같다거나, 찌르르 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저릿하다거나 쨍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말을 통에 응급구조사는 환자가 가리키는 고통의 진원지를 추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환자는 도와주러 온 사람이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유추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문장이 되지 못하는 불분명한 표현이라도 용기내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문학의 근원적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라고 자신의 저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에서 밝혔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정확하게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는데, 존재의 실질은 끊임 없이 변화하며 그동안 진실이라고 믿었던 사실의 지속적인 갱신을 요구합니다. 사랑을 정확하게 실험하는 것만 그러할까요? 신형철 평론가의 다른 저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2018)>을 보면 슬픔 역시 정확한 실험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내가 수술을 받은 날 우리는 병실에서 껴안고 울었는데 울면서도 나는 아내와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았고 그 슬픔으로부터도 아내보다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는 무참해져서 이제부터 내 알량한 문학 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신형철 평론가가 썼던 두 권의 책을 읽고 인간의 언어적 한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최대한 정확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것이 도리어 상대에게 상처가 되고, 위로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절망을 자아낼 수도 있습니다. 정확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닌 제일 소중한 것을 할애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지닌 생명, 즉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 아파하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급여를 받기 위해 출근하여 하는 일이지만, 제가 지닌 유일한 삶을 나눠 아파하는 사람들과 병원에 동행합니다. 이것을 짧게 표현한다면, 결국 복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술에 취한 주쥐자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다가 넘어져서 이마가 찢어지고 얼굴에 피칠갑을 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한 경우 경험상 그를 안정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식염수에 적신 거즈로 혈흔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출혈이 시작된 이마에서 시작하여 외투, 피투성이가 된 손과 바지를 닦아주는 데 이르면 악을 쓰고 욕설을 내뱉던 사람의 마음은 풀어져 이내 소방대원과 경찰관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는 합니다. 치매 노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방금 전까지 자기가 어디가 아픈지 설명하지 못했던 노인은 눈에 낀 눈꼽과 눈물,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드렸더니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말을 통해 저는 도저히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고통의 일부가 조금은 위로받고 사랑받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고통이 소거되며 그들의 존재가 조금은 가벼워지기를 바라지만, 정말 그럴 수 있게 될 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지난 몇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참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피해자는 물론, 피해 유가족들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언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려는 노력은 종국에는 실패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확히 사랑하고 위로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겨진 이들을 기억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가 가진 유일하고 귀중한 삶을 나누어, 고통받는 유가족들이 자신의 고통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청취할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유가족들은 문장이 되지 못한 불분명한 표현이라도 용기내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24년 12월29일, 제주항공 참사 소식을 듣고 수원시 파장초등학교에 다니는 5학년 전시윤 군은 부모님의 만류를 뒤로하고 홀로 무안공항을 찾아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쓰레기를 줍고 분리배출 안내문을 만드는 등의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봉사가 아니라 슬픔을 나누고 온 봉사"라고 말했습니다. 전 군의 삶을 통해 타인의 고통이 알 바 아니라고 불순하게 말해왔던 대중 일부의 태도에 대해 한번쯤은 중대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 군처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정확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계속된 실험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은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문학을 통해 사랑과 슬픔을 공부한 것처럼, 제가 구급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 배운 나름의 공부입니다. 배우게 된 것을 만년필로 적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