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를 기다리며

by 소방작가

바둑판 위에 착수한 돌 중에 완전하게 살아있지 못한 상태를 '미생(未生)'이라고 하지요. 미생인 상태의 바둑돌은 그래서 '완생(完生)'을 꿈꿉니다. 그래서 온갖 고난과 역경에 맞서서 계속 바둑돌을 이어가며 전투를 치르지만, 승리의 길은 멀고도 험하기만 합니다. 돌을 길게 이어 대마(大馬)를 이뤘다고 해도, 종국에 승점으로 이어질 수 있을 지 불투명하거든요. 바둑판에서의 사투를 그만두고, 무역상사에서 제한 없는 교차점 위에 바둑돌을 두기 시작하는 장그래의 이야기 웹툰·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는 사내 프레젠테이션에서 사무실에서 신는 슬리퍼를 '전투화'라고 표현합니다. 그 장면을 통해 장그래가 회사에서의 일과를 바둑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슬리퍼와 전화기, 수첩과 볼펜 등의 사무용품을 바둑돌로 여기고 있음을 작가는 부가적인 설명을 하지 않아도 시청자들에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전장은 어디인가요? 그리고 바둑돌처럼 여기는 도구는 무엇인지 궁급합니다.

어느날, 저는 직장 내에서 실시하는 심리검사에서 결과가 좋지 않아서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정밀 점사를 받은 적이 있어요. 검사 결과, 교대근무로 인한 수면 박탈과 사고 트라우마로 제 단기 기억력이 감소한 것이 관찰된다고 하시더군요. 실제로 저는 소방서에서 일하게 된 후로 무엇인가를 외우는 것을 잘 하지 못하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소방서에는 수 많은 바둑돌이 있습니다. 재난 상황의 성격에 알맞게 다종다양한 장비를 활용해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요. 화재진압 대원이었을 때는 검은 미연소 가스가 가득 찬 화재현장에서 화염을 진화하고, 비상상황 발생시 탈출하는 방향을 일러주는 '소방호스'가 제일 중요했고요, 구조대원의 임무를 맡았을 때는 시건장치에 정을 박아넣어 결속을 해제하는 '방화문 파괴기'를 좋아했습니다. 구급대원이 된 지금은 어떨까요? 구급차 안에도 제세동기(AED)를 비롯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데 필수적인 장비들이 많지만, 제게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는 '모나미 네임펜 F촉'입니다.


환자를 접촉하고 혈압, 맥박, 체온, 산소포화도, 병력 청취 및 통증의 양상과 증상을 바탕으로 환자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데이터를 구급일지를 작성하고 의료진에게 인계해야 환자는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저는 다양한 수치를 단기적으로 암기해야 하는데, 저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된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손에 착용한 의료용 라텍스 장갑 위에 환자와 관계된 모든 정보를 적습니다. 더군다나 의료대란이 장기화된 작금의 상황에는 일일이 개별적인 병원에 전화하여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의사 선생님이 계신지 문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심근경색 환자 이송과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최대한 낭비하지 않기 위해, 전화를 했던 병원의 목록을 손등에, 손등의 공간이 부족하면 손바닥에 적고 있습니다. 네임펜이 없으면 저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근무복의 왼쪽 주머니에는 항상 모나미 펜이 들어있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펜은 훼손된 제 삶의 기능을 회복시켜주는 도구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도구란 신체 기능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게 도와주는 물건입니다. 그래서 직업이 다르다는 것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도구가 다르고 그 도구를 다루는 숙련도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도구로 인해 연장된 신체가 하는 일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발달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도구에 의해 서로 다른 몸을 지닌 우리는 함께 모여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온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스승이 되어 각자의 삶에서 발생하는 결손을 최소화합니다. 우리 사회는 선의에 의해 서로를 도구화하는 것을 허용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것은 피로 쓰여진 선조의 역사에 의해 이룩한 규칙입니다.


오늘은 굳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공기처럼 향유했던 우리의 역사에 큰 변곡점이 되어줄 헌법재판소 판결이 있는 날입니다. 모두가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오전 11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의한 목적으로 국방력을 전용하여 자신의 조국을 공격함으로써 파멸에 이른 국가의 전제 군주가 되고자 했던 윤석열의 파면만이 건강한 공동체를 되찾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수해 현장에서 자신의 치적을 위하여 부하를 사지로 몰았던 지휘관을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북 경찰청에 이첩한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을 '항명 수괴'로 몰아 처벌하려고 했던 것은 군과 공직사회 전체에 불의한 명령이라도 복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은 곧이어 일어날 내란을 예비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공화국의 전복을 위해서는 영혼 없이 무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조력자들이 필요합니다. 영화 《스타워즈》에서 공화국의 의회의 의장 팰퍼틴은 은하제국의 공화제를 절멸시키고 시스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하여 명령의 내용을 비판하지 않고 무조건 복종하는 클론 군대를 동원하여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힘쓰는 제다이 전사들을 모조리 암살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계엄 이후 줄곧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문을 개방해온 전문가로서, 계엄군의 명령에 의해 계엄 해제 표결이 진행 중이던 본회의장의 문을 개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리고 그 명령을 거부한 채 계엄이 성공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말입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보면 광주민주화 운동에서 자유를 부르짖었던 시민군들의 손가락에 모나미 볼펜을 끼워 손가락을 주리를 트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문기술자들은 시민군들의 손에 볼펜으로 고문을 가했던 이유는, 그것이 제가 주머니에 항상 모나미 펜을 들고다닐 수 있었던 것처럼 모나미 펜이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물건이었기 때문이고 또 뼈가 드러날 정도로 손쉽게 고문할 수 있는 기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손가락에 고문을 가하고 난 후 약솜을 끼워두면 시민군의 저항이 북한의 지령에 의한 만행이었다는 자백을 받아낸 후에 군사재판을 받기 전까지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부위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문기술자들은 이처럼 모나미펜과 길이를 재는 자 등으로 시민군들을 고문했고, 그들의 영혼을 산산조각냈습니다. 아마 계엄이 성공했다면, 언젠가 저도 주머니에 있던 바둑돌인 모나미 펜으로 고문을 당하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산 자들이 죽은 자를 위해 공화국을 구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시간 남았네요. 정의로운 선고가 있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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