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기록

일상 에세이

by Pink Brown

일기는 쓰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일기 쓰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방학숙제로 내주는 일기 쓰기는 개학 하루 전에 몰아서 쓰는 것이 습관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대단한 일이긴 하네) 별거 없는 일상에 쓸게 무엇이 있다고 일기를 쓸까. 쓸 것도 없지만 꼬박꼬박 챙겨 쓰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는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내가 점점 사라지는 삶을 살아가고,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내가 오롯이 존재하는 시간 없이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니 문득 기록하고 싶어졌다. 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언제 무엇을 했는지, 간단하게라도.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다이어리를 산다. 그리고 만년필도 산다. 딥펜을 좋아하는 구석이 있는데, 딥펜은 아무래도 쓰기가 번거롭다 보니 만년필로 넘어갔다. 그러다 보니 잉크로 넘어가는 자연스러운 구매 패턴. 물론 잉크는 스스로 마시지 않는 이상 온전한 한 병을 다 쓰는 것을 불가능하다고들 하여 소분된 것으로 구매한다. 그리고 만년필 여기저기에 색깔별로 넣어놓는다. 그래봤자 대부분 잊고 있다가 증발되어 버리곤 하지만.


그 해의 다이어리와 주로 쓰는 만년펜은 회사 책상 앞쪽에 전진 배치 되어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모든 것은 사라지는 법이라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놓아야 그나마 가끔 챙겨서 몰아서라도 적게 된다. 여전히 몰아서 적는 것이 함정이긴 하지만 최소 주 단위로는 정리하고 있다. 내용은 정말 간단하다. 오전 반차, 공연 관람, 친구와의 점심, 가족 여행으로 간 장소, 명절과 휴일의 표시, 가족들의 생일, 그저 일상적이지만 적어놓고 싶은 것들. 그중 정말 기억하고 싶은 것은 다이어리 뒤편 노트 쪽에 별도로 적는다. 정말 일 년에 손에 꼽을 만큼이지만 그래도 적어놓고 싶은 것들이 있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현타,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들에 대한 한탄, 아주 감동적이었던 공연의 후기, 절대 공개하기 어려운 감성에 흠뻑 젖은 흐느적거리는 생각들. 그리고 내가 나를 다독이는 나의 위안을 위한 글.


나이를 많이 먹게 되면, 인생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지 않게 되는 때가 오면, 기억과 추억으로 살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적어온 것들을 다시 열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그때가 오면 아마도 열어보겠지.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더 많이 적어놓을걸. 하지만 미래의 나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현재의 나는 그렇게까지 적을 의지는 없다. 적성에 안 맞는다고, 이 정도라도 적은 것에 감사하라고. 같은 나이지만 벌써부터 미래의 충돌이 예견된다. 예견되면 충돌을 방지하면 되잖아라고 생각하겠지만, 생각보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게 되면 지금의 나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으니.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것들을 내 맘대로 바꿀 수 없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설 연휴부터 다이어리를 정리하지 않았다. 오늘 오후에는 몰아서 정리를 또 한 번 해야겠다. (주 단위를 넘어갔군. 이건 반성할 포인트이다.)


다이어리에 그려져 있는 고양이들이 나를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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