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산책

계절편지 - 25년 5월(2nd)

by Pink Brown

해 질 녘에 고궁에 가 본 적이 있나요?


그날은 바람막이와 어쩌면 경량 패딩 조끼가 필요했던 어느 저녁이었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덕수궁 근처에서 축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림 대회 수상작들이 돌담에 걸려있고, 푸드 트럭에 갖가지 소품을 판매하는 부스까지 사람과 물건과 공기와 소란스러움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요. 저는 처음에는 살짝 실망을 했더랍니다. 덕수궁 돌담의 아름다움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부스와 전시물들이 돌담을 몽땅 가리고 있었으니까요. 특히, 예전에 보았던 비 오는 날 저녁의 덕수궁 돌담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더욱더 아쉬움이 컸습니다. (아, 그날 비가 오지는 않았어요. 저녁의 돌담을 함께 보고 싶었을 뿐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풍물놀이패가 흥겨운 리듬을 풍기며 지나가고,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불이 켜지면서 마음이 점점 즐거워졌습니다. 밤의 고궁은 지금까지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점점 설레어지기 시작했죠.


전문 가이드님께서 달빛 투어를 해 주셨습니다. 가이드 투어를 하는 팀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라웠습니다. 한국사 중에서 덕수궁에 얽힌 부분들을 각 전각과 장소에 맞게 옛날 이야기하듯 말씀해 주시는 것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신이 나서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는 사이 궁궐은 깊은 밤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투어는 눈 깜짝할 새 끝나고, 투어의 여운이 남아 우리는 좋았던 전각을 다시 돌며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지요.


낭만이 있었습니다. 불행한 삶을 보낸 사람들이 많았던 덕수궁의 역사였지만, 사가로 지어져서 궁으로 승격된 덕수궁의 독특한 이력과 유일한 건물들이 많은 특징(궁궐 중 유일하게 2층 전각이 있다든가, 서양풍 석조전이 있다든가) 덕분에 일반적인 궁이 아닌 조금 더 친숙한 공간으로 다가왔습니다. 쌀쌀한 바람에 코 끝이 조금 시려왔지만 우리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달이 밝았습니다.

바람이 달을 스치고 지나갔지요.

그 아래 고즈넉한 전각들이 낮게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석조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덕혜옹주를 위해 마련된 궁궐 내 자그마한 유치원의 기단 위에 지금도 마치 작은 옹주가 서 있는 것을 직접 본 것 같은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달이 말갛게 뜬 서늘한 저녁에 한 번 가보셔요. 달빛 궁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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