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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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쓸 도리 없이 예림의 몸은 공중으로 떠오른다. 곧이어 쿵 소리를 내며 지면으로 곤두박질친다. 세상이 하나의 구가 되어 데굴데굴 구른다. 시야가 새하얀 빛으로 가득하다. 예림은 마침내 멈춘 세상을 바라본다. 백지장 같은 표정 없는 하늘이 예림을 내려다본다. 차가운 진눈깨비만이 예림의 얼굴에 닿는다. 고른 엔진음과 질척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아득해지고, 말벌이 내는 소리 같은 이명이 귓가에서 웽웽거린다.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는 예림의 몸 위로 두 인영이 내려앉는다. 자신을 들이받고 바로 줄행랑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예림을 가운데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두 소년은 다소 난처한 기색이다. 예림은 이명이 멎기를 기다리며 두 소년의 입 모양을 읽어내려 노력한다. 합의를 끝낸 듯한 그들은 예림의 팔다리를 붙잡는다. 소년들의 손길이 닿자마자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려온다. 어차피 꿈에서 깨어나면 사라질 고통이지만 예림은 울음을 터뜨린다.
메아리가 된 울음소리가 산을 찢든 말든 두 소년은 예림을 검은 승용차 뒷좌석에 욱여넣는다. 운전석에 탄 소년이 서둘러 차 문을 잠근다. 예림은 새로운 절망이 극심한 고통을 삼켜주길 바라며 창밖에 펼쳐진 정경을 바라본다. 순간의 정면충돌을 목도한 태양은 이울긴커녕 겨울 산속 나무들을 한층 빛나게 만든다. 예림이 합당한 벌을 받은 게 만족스럽다는 듯, 그들은 아름다운 가지를 부르르 떨며 깔깔거리고 있다. 예림은 눈을 감아버린다. 찬란한 빛의 잔상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이상한 꿈. 예림은 교통사고가 일어났던 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움직이는 소년은 신해운이고, 조수석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녀석은 지수열이다. 신해운을 불러 보지만 그는 답이 없다. 어디서 짐승 새끼가 낑낑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며 지수열이 빈정거린다. 예림은 입을 다문다. 얼굴을 적시는 피가 홍조를 감춰 줘서 다행이라 여긴다. 예림은 두 소년의 동태와 자신의 상태를 살핀다.
자신이 체념했던 염원이 과연 죽음이 맞던가? 구원받기만 한다면, 맞닥뜨린 상대가 누구든 아무래도 좋았던 걸까? 갖가지 의문이 엉켜가고, 바라 마지않던 망각이 뱀 같은 혀를 날름거린다. 불쾌한 서글픔과 온몸을 옥죄는 고통에 신음이 나온다. 예림은 두 소년을 모르고 싶다. 저들과 함께 산속을 벗어날 바에야 홀로 눈밭을 기며 죽어가는 편이 낫다.
예림은 빨리 깨어나고 싶다. 얼음장 같은 차 안에서, 좌석에 스며드는 뜨거운 피에 필사적으로 의존하며 눈을 꽉 감아 본다. 미간을 힘껏 찌푸리고 발가락에도 힘을 준다. 그러나 여전히 빌어먹을 꿈속이다. 지쳐버린 예림은 미쳐버리기 전에 다른 시도를 하기로 한다. 그건 자신이 두 소년에게 포획된 짐승이라는 진실을 힘들여 외면하는 일이다.
별안간 신해운이 차를 세운다. 왼편의 문이 벌컥 열린다. 지수열은 제 발로 차에 탑승하는 인물을 향해 휘파람을 분다. 그는 왼손 엄지를 튕겨 지포 라이터 뚜껑을 여닫기를 반복한다. 딸깍거리는 소리에 두통과 구토감이 인다. 속을 달래기 위해 엄마가 가르쳐주었던 혈 자리를 지압하며 예림은 새로운 인물을 곁눈으로 훔쳐본다. 얼굴은 알되 이름은 모르는 소년이다. 다부진 체격에 서글서글한 인상이지만 얄궂은 눈빛에 느닷없는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왜 하필 나야?”
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예림은 룸미러에 비친 신해운의 무감한 시선을 끌기 위해 노력한다. 지수열에게 소음을 멈춰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자신을 주시하는 낯선 소년의 미소를 애써 모른 체 하기도 하며 대답을 요구한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허공에 대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던 예림은 점점 지쳐간다. 자신의 목소리에 실린 노기마저 거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도로에 흥건했던 피는 사이드미러 밖으로 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경련하는 산짐승처럼 상처가 검은 승용차 뒤를 쫓아온다. 예림은 끈질기게 답을 기다린다. 드디어 이름 모를 소년이 입을 연다.
“너의 오만함을 꺾고 싶었으니까?”
소년이 추위에 부르튼 손가락을 꼽는다. 커다랗고 선이 굵은 손이다. 예림은 그 손이 치 떨리게 싫다.
“그리고 넌 보호자도 없지.”
소년의 답이 만족스러운 듯 수열이 거듭 엄지를 튕긴다.
“너만큼 쉬운 애도 없었어.”
“…진짜 이유를 말해.”
라이터 뚜껑이 내던 금속성의 소리와 멈출 기미가 없던 출혈이 일순 멎는다. 피에 푹 젖어 있던 좌석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예림을 돌아보는 지수열의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 없다. 꿈속이어도 그가 무섭다. 예림은 꿋꿋이 그의 시선을 맞받는다. 수열의 고개가 다시 정면을 향한다.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글로브박스를 걷어찬다. 이름 모를 소년이 벙글거리며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인다. 그의 어깨와 예림의 어깨가 부딪친다.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 예림은 짧은 비명을 지른다. 소년은 짐짓 놀라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한숨 자도록 해.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
다정한 말투로 소년이 말한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시야를 가린다. 대관절 어디로 가는 중이냐고 묻고 싶지만 졸음이 절망과 고통을 잠재운다. 오한마저 가라앉힌다. 소년이 손을 오므려 만든 작은 어둠 속에서 예림은 새삼스러운 사실을 되새긴다. 자신은 언제나 헤매는 중이다. 집을 떠나온 건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모른 채. 결빙 구간에서 신해운이 액셀을 밟는다. 조수석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예림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차는 용케도 미끄러지지 않고 나아간다.
과학부장이 생물 수업은 당분간 과학실에서 진행된다고 공지하자, 교실의 이목이 예림에게 집중되었다. 아이들이 대놓고 드러내는 감정을 예림은 어렵지 않게 감지했다. 그들에게 자신은 포르말린에 담긴 개구리 표본이나 다름없었다. 개구리 표본. 그건 예림도 떨치기 어려운 상(像)이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과학실로 향한 이가 자신이어서, 예림은 해운을 볼 낯이 없었다. 해운과의 이별은 당연한 결과였다.
“저런 거나 치덕치덕 바르고 다니니 수준 알 만 하다.”
“쟤가 걔야. 지수열이랑…”
“학교에서? 무슨 정신으로 그랬대?”
아이들의 과녁이 된 예림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였다. 책상 위를 그저 응시하는 일. 하필 화장품 파우치를 연 참이었다. 교사들은 옅은 화장을 하고 교정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귀신같이 잡아냈지만, 예림의 화장을 지적하진 않았다. 감상적인 몇몇은 오히려 예림을 측은하게 여겼다. 그럴 때마다 나희 어머니나 친척들이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어른들이 눈감아준 성의를 봐서 마음껏 교칙을 어겼다. 선망의 시선과 욕망의 시선, 질투의 시선과 업신여기는 시선. 그 어떤 시선이라도 예림은 항상 기꺼웠다. 세간이 바라는 학생의 모습에서 멀어질수록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자신을 꾸준히 괴롭히는 죄책감과 무관한, 전혀 다른 사람이.
예림은 티슈를 뽑아 입술을 문질렀다. 이제 아이들의 시선은 꽂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가슴을 꿰뚫을 수 있는 시선의 힘을, 타인의 시선은 절대로 자기 욕망이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예림은 비로소 뼈에 새겼다.
아이들에게 예림은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한 소녀가 있었다. 타오르는 노을에 물들어, 욕망에 젖은 눈으로, 춤추듯 과학실로 갔다. 자신에게 과분한 남자 친구는 안중에도 없던, 그런 악녀가 있었다.
“남자에 미친 강도가 저 정도라면… 애초에 타고난 기질이 그런 거 아냐?”
“그러니 멀쩡한 남자애들이 그렇게 퍼줬겠지.”
아이들은 예림을 비난할 수 있기에 정의로웠다. 참다못한 나희가 예림의 팔을 붙잡았다. 예림은 나희를 달래 도로 앉히고 자신도 자리를 지켰다. 입술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태연히 웃으며 다른 색 립스틱을 보란 듯 발랐다. 평소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호의를 받았다는 이유로 과학실에서 벌어진 일이 자신이 원한 일이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다음 화]
볼을 스치는 해운의 손끝이 기분 나쁠 정도로 미지근했다.
“너니까 말해주는 거야. 어쨌든 좋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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