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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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학기가 시작된 뒤, 예림에 관한 소문에 예민하게 굴었던 나희도 점차 입을 다물게 되었다. 쉬는 시간에 이어폰을 꽂고 단어를 외우던 나희가 이젠 헤드폰을 챙겨 썼다. 예림은 음악에 파묻힌 나희의 어깨나 나희가 노려보는 문제집 여백을 건드리는 것도 미안해졌다. 차라리 나희가 시원하게 화를 내길 바랐다. 친구의 충고를 귀담아듣지도 않고, 정신을 쏙 빼놓고 다녀서 이런 사태가 일어난 거라고 소리라도 질렀으면 했다.
나희와 컴퓨터실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구름다리를 지나기 전, 예림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했다. 신해운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이 기나긴 지옥의 시간이 모두 작심하고 자신을 속이기 위한 몰래카메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발걸음이 저절로 그에게 향했다.
“네가 저기 가서 뭘 어쩌려고 그러니? 이제 너와는 상관없는 애잖아.”
나희에게 붙잡히자 예림이 지금껏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잘못을 저지른 자는 응당 벌을 받는 게 당연했다. 마치 더부살이라는 벌로는 약했던 모양인지, 자신이 과학실 사건이라는 가중 처벌을 받은 것처럼. 그러나 아이들과 어울리며 경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신해운의 얼굴 어디에도 그늘 한 점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근사한 얼굴엔 오직 햇살만이 다였다.
느지막한 밤, 예림은 인적 드문 산책로로 신해운을 불러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나를 다 부르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어투였다. 해운은 여전히 선량해 보였다. 예림은 팔짱을 끼고 심호흡했다. 해운의 무해한 눈빛이 이젠 버거웠다.
“난… 분명 우리끼리 할 얘기가 더 있다고 생각해.”
지수열을 의식불명으로 만든 신해운을 이전보다 더 친근하게 대하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무심한 눈길조차 두려워 화장실도 마음 놓고 가지 못하는데 말이었다. 예림은 두 팔을 양껏 꼬집었다. 치밀어 오르는 굴욕감을 이겨내지 못하면 이야기는커녕 눈물도 참아내지 못하리라.
“이제 널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지수열은 당해도 싼 놈이었대. 그간 너를 고통스럽게 했으니까. 다들 네 심정을, 지수열을 그렇게 만든 심정을 이해한다고…”
그런데 어째서, 아무도 내가 고통을 겪었다는 가정조차도 하지 않는 거야? 토해내고 싶은 마지막 말을 간신히 삼키며 예림은 간절한 눈길로 해운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래. 그 새끼는 당해도 쌌어. 그런 당연한 소리나 하려고 날 불러낸 거야?”
“신해운. 너 내 소문 알고 있지.”
“…….”
“대답해. 너도 귀가 있잖아.”
“…알고 있어.”
평생 가족을 기만했던 사랑도 있는 세상에, 빨리 식어버리는 풋사랑 또한 유별나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해운의 난색이 상처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해운이 싫증을 내며 대화를 거부할세라 예림은 서둘러 대화를 이어갔다.
“다들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멋대로 떠들고 있어. 나도 지수열처럼 당해봐야 한대. 내가 그동안 다른 남자애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편하게 학교생활을 했다는 거야. 나는 걔들에게 먼저 말을 건 적도, 친절을 베풀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그래서?”
해운의 냉담한 태도에 결국 시야가 흐릿해졌다. 예림은 뺨을 적시는 눈물과 떨리는 목소리를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그에게 질릴 대로 질린 여자애로 남게 생겼는데, 눈물을 닦을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겠는가.
“…그때 헤어지자고 한 건 너였어. 똑바로 널 봐달라고 했지. 난 그런 널… 이해했어. 그런데 넌, 어째서 한마디도 날 변호해주지 않는 거야? 내가 가당찮은 소문으로 손가락질 받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하, 그래. 너도 다른 애들처럼 생각하는 거야? 내가 네 인생을 망쳤다고?”
“왜 내가 널 위해 해명씩이나 해야 해? 일주일 정학이면 이미 차고 넘치지 않나?”
예림은 신경질적인 너털웃음을 쳤다. 왜 신해운의 눈치를 본 걸까. 왜 신해운의 태도에 상처를 받고 앉았던 걸까.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에게 호소라니, 오히려 봉안당에 가 신세타령을 하고 오는 편이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그곳에 안치된 유해는 아직도 낯설지만, 적어도 사진 속에서 부모님은 웃고 있을 테니! 예림은 당장 분노해야 했다.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 멍청한 소년에게 토로해야 했다. 지면이 걷잡을 수 없이 꺼져버리기 전에.
“신해운. 제발 똑바로 기억해. 내가 원했어? ‘그 녀석들에게 복수해 줘. 지수열 머리를 벽돌로 갈겨서 영영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줘.’라고 내가 부탁했니? 네가 나를 위해 희생했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마. 그 자식 머리를 부수고 싶었던 건 다름 아닌 너였어. 내 의지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해운은 실소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저 살랑살랑 활보하며 허황한 소리만 지껄이는 게 전부인 애였는데, 저렇게 분개하는 모습을 보니 아주 다른 애 같았다.
“네가 왜 그때 헤어지자고 했는지 잘 알겠다. 신해운, 너도 소문을 믿는 거야. 난 잘못한 게 없다고, 그렇게 달랬지만 마음 한 켠에선 계속 의심했겠지.”
“야, 송예림! 넌 말을… 너야말로 날 비열한 인간으로 보고 있었던 거야? 난 네 남자 친구였어!”
“허, 왜 화를 내는 거야? 말 돌리지 마. 네가 그런 인간이든 아니든 지금은 전혀 무관한 얘기잖아!”
“입 닥쳐. 결국 너도 똑같은 인간이야.”
해운은 밀려오는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다. 송예림은 앞으로 불특정 다수의 가혹한 비난과 경멸에 짓눌린 채 살아갈 것이었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 양 책임을 요구하는 송예림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한때 남자 친구였던 자신을 싸구려 소문에 넘어간 멍청이 취급하는 애의 보잘것없는 앞날 따위를, 왜 염려해 줘야 하는지 도통 납득할 수 없었다.
“…넌 그동안 나랑 사귀면서 내가 네 남자 친구라는 자각이 있긴 했었냐? 없었겠지. 이렇게 혼자 잘나셨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해운의 시선에 예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소문이 그저 헛소문일 뿐이라고, 네가 정말 헤프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예림이 시르죽었다고 여긴 모양인지 해운은 득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예림이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로 돌아왔다는 듯 예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힘들겠지.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건 참 유감이야.”
예림은 해운의 손길을 내버려둔 채 멍하니 가로등 불빛을 응시했다. 해운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을 짓누르던 굴욕감의 종류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자신이 진정 사랑 받고 있다고 믿었던 시간. 그 흐름 속에서 얼마든지 모욕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고, 그 거리만큼 사랑을 속삭였던 것이었다.
“너 가끔 싸 보일 때가 있었어. 너무 웃고 다니지 마라.”
볼을 스치는 해운의 손끝이 기분 나쁠 정도로 미지근했다.
“너니까 말해주는 거야. 어쨌든 좋아했으니까.”
이런 희롱을 할 바에야 차라리 그가 뺨을 갈긴 뒤 침이라도 뱉고 떠났으면 했다. 그러면 이렇게 주저앉아 비명을 질러도 행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이제 네가 스스로 해결해. 언제까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거야?”
해운이 어른들의 도움을 구하자고 예림에게 사정했던 게 불과 한 달 전 일이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한참을 앉아 있던 예림은 터덜터덜 고모의 집으로 향했다. 지수열이 의식을 잃은 이상 진상을 밝히기 어려운 일이니, 섣부른 비난은 삼가자는 미약한 여론에 한마디 보태는 일이 그렇게 하기 싫은 걸까. 그 정도로 자신이 꼴도 보기 싫은 걸까. 이쯤 되면 정말 자신에게 문제가 있나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신해운마저 돌변할 리 없지 않은가. 예림은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틀었다. 피부가 얼얼할 정도로 연거푸 세수를 했지만 눈물이 끊임없이 볼을 적셨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고모보다 나이 들어 보였다. 예림은 입꼬리를 슬며시 올려 보았다. 웃는 낯을 이리저리 비춰 볼수록 신해운의 비방이 귓가에 맴돌았다.
“……”
예림은 다시 수도꼭지를 돌렸다.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기를 내버려둔 채 예림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쉽게 잘못을 용서받은 신해운과 실수를 전혀 용서받지 못한 자신에게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궁리했다.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예림은 베개를 꼭 끌어안고 몸을 뒤척였다. 머릿속에서 신해운과의 대화가 반복 재생되자 두 다리를 바동거렸다. 쿠션과 이불이 침대 밖으로 모조리 굴러떨어졌지만, 그의 비수 같았던 말과 볼에 닿았던 미온이 생생했다. 뇌리에서 신해운을 몰아내는 데 실패한 예림은 그가 알아서 사라져 주길 바라며 천장만 바라보았다.
문득 수수께끼 같았던 몇몇 소년들이 떠올랐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다가도 히죽 웃던 그들은 어느 순간 의기소침해지다가 돌연 원망의 눈초리를 하곤 했다. 또래 남자아이들이란 변덕스러운 날씨와도 같이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 어떤 불쾌한 생각이 스쳤다. 소년들의 마음이 꼭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사과 같았다. 어쩐지 으스스해진 예림은 이불에 손을 뻗어 침대로 끌어올렸다. 작지만 든든한 친구인 나희를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나희야, 인정할게. 네 말 틀린 거 하나 없네.’
나희는 이 말을 듣고 한술 더 뜰지도 몰랐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 신해운도 똑같아.’
신해운 또한 키스를 퍼부었던 대상에게 언제든 독약을 쓸 준비가 되어 있던 상태였다고, 상상 속 나희가 쏘아붙였다. 예림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다음 화]
“너 같은 애 때문에, 진짜 피해자가 입을 다무는 세상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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