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머리칼은 예림의 자랑거리였다. 예림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골머리를 앓았다. 머리칼을 잘라 시야를 가리는 일 말고는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두려웠다. 머리카락을 자르면, 누군가는 아물지 않는 상처를 전혀 감당하지 못하는 이 꼴을 눈치채지 않을까?
예림은 머리칼을 어깨 위로 쳐냈다. 앞머리를 내 눈을 가렸다. 교복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던 습관은 일찌감치 버렸다. 예림은 아예 교복 재킷을 챙겨 입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날, 그때 입었던 옷차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교사들이 예림의 행실을 지적하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훈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예림은 생물 이동 수업도 듣지 않았다.
밤에는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수열, 신해운, 이름 모를 소년, 같은 반 아이들이 매일 밤 찾아왔다. 그들은 예림이 아는 진실을 그가 모르는 것처럼 속삭였다. 어떤 날에는 예림이 모르는 진실을 그가 안다는 듯 굴기도 했다. 뒤척이던 예림은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1층으로 내려와 부엌으로 향했다. 열어 둔 서재에서 흘러나온 샛노란 빛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벌써 두 시가 넘었는데, 왜 자지 않고.”
예림은 슬며시 빛 속으로 들어가 서재 내부를 훑었다. 정작 그런 말을 건넨 고모도 라디오를 켜놓고 서류를 훑는 참이었다. 고모가 고개를 들지 않아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너 번호 바꿨더구나.”
딱히 답을 바라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예림은 주뼛거리며 잠옷 소매를 쥐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이후 시도 때도 없이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쌓였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내용일지는 뻔했다. 예림은 말없이 서재를 지나 부엌으로 갔다. 유리컵에 차오르는 물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고모는 허울뿐인 보호자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이 집을 떠날 작정이었다. 그러니 고모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털어 놓을 이유는 하등 없다고, 다시금 마음을 정리했다. 2층으로 올라가기 전 고모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렸다.
“자기 전에 나한테 전화 한 번만 하고 자렴.”
“…네.”
새벽 5시가 가까워질 무렵, 예림은 겨우 잠이 들었다. 그마저도 꿈을 꾸었다. 예림은 몸부림치는 누군가의 내부에 있다. 그 살가죽을 찢고 도주하는 일과 이대로 침체되어 포기하는 일. 그 존재에게 가해지는 아픔보다 예림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건 주어진 방도가 양자택일이라는 사실이다. 예림의 시야에는 벽에 내던진 젤리처럼 유리창에 짓뭉개진 석양 그리고 양서류의 창백한 몸체뿐이다. 예림은 결국 그 몸을 찢고 나온다.
그 존재와 눈이 마주친 순간, 명백한 사실에 의심이 깃든다. 의심은 사실을 질문으로 만든다. 송예림은 정말 송예림인가? 만약 그렇다면 여기 누워있는 건 뭘까? 끝내 답을 내릴 수 없는 예림은 질문마저 잊는다. 과학실 문을 열어 복도를 달린다. 한참을 달리던 예림은 우뚝 멈춰 선다. 다리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당연한 현상에 섬뜩한 의구심이 스며든다. 자신은 인간이었던가? 아니면 그저 물건이었던가.
‘네가 여기에 들어온 순간, 넌 이미 죽어버린 거야.’
겨울 방학식을 앞둔 날, 바닥에 주저앉아 토하던 예림에게 소년이 건넨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부당한 소문이 가라앉지 않을까 기대했다. 헛된 바람이었다. 예림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교과서를 넘겼다. 활자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 분단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예림은 그 애들이 제 얼굴을 보지 못 하도록 귀 뒤로 넘겼던 머리칼을 뺐다. 뒤편에서 아이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바람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예림은 한숨지으며 턱을 괴었다. 그마저도 아이들의 주의를 끌세라 조심스럽게 숨을 쉬었다. 교과서는 진도 나간 범위를 지나 어느새 절반이나 넘어갔다. 예림은 자습을 시키고 나간 담임이 원망스러웠다. 나희에게 MP3를 빌릴지 고민하던 차에 옆 분단에서 자신의 이름이 또렷하게 들렸다.
“이 프린트 좀 송예림에게 줘.”
생물 부장의 목소리였다.
“왜 내가? 네가 직접 해.”
“나희한테 주면 되잖아?”
“아… 난 쟤도 좀 그렇단 말이야.”
예림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나희의 옆을 째려보았다. 생물부장의 짝과 그 앞자리 아이들이 머리를 맞댔다. 사고가 터질 낌새를 알아차린 나희도 이어폰을 천천히 뺐다.
“난 연나희 속도 모르겠어. 내가 쟤라면 송예림은 진작 버렸어. 뭐 하나 득 될 게 없잖아.”
“그건 그렇지. 쟨 최악조차 될 수도 없어.”
“저 뻔뻔한 얼굴 좀 봐. 뭐 잘한 게 있다고 노려봐?”
“나 같으면 창피에서 학교 못 다녀.”
예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발, 제발 참아. 예림아.”
나희가 소맷부리를 잡아당기며 간청했다. 예림은 나희의 손을 꽉 쥐고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난 하지 않았어.”
오른편에 앉은 남자애가 이죽거렸다.
“뭘 안 했는데?”
“난 지수열과 하지 않았다고!”
예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아이들의 박장대소가 교실을 쩌렁쩌렁 울릴 거라 여겼다. 그러나 교실엔 정적이 감돌았고, 옆에서 나희의 탄식 소리만이 들렸다. 예림은 눈을 살짝 떠보았다. 자신을 향한 아이들의 시선엔 경멸만이 담겨 있었다.
“쟤 뭐야. 관심이 저렇게 받고 싶었어?”
“누가 물어봤나?”
자신의 식은땀인지 나희의 것인지 모를 액체가 손에 배어들었다. 두 손은 점차 차가워졌다. 예림은 나희의 손이 잃어버린 유품이라도 된다는 양 재차 쥐었다. 아이들이 미운 만큼 두려웠다. 그러나 저들이 자기 말을 들어주길 바랐다.
“난 강간 당한 거야.”
예림과 나희를 제외한 전원이 숨을 들이켰다. 그 누구도 예림을 비웃거나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마치 예상치 못한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한 듯한 얼굴로 예림을 응시했다. 그건 순간에 불과했다. 엄숙할 정도로 무겁게 내려앉았던 침묵은 이내 어떤 아이의 감탄사로 깨졌다. 그 외마디에 담긴 조롱에 예림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아이들의 얼굴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일그러졌다. 어떤 남자애가 성큼 다가오더니 발길질을 했다. 예림의 책상과 나희의 책상이 같이 밀려 나갔다.
“와… 내가 어쩌자고 이런 애를 좋아했었지?”
아이들의 반응은 한층 더 거칠어졌다.
“너 같은 애 때문에, 진짜 피해자가 입을 다무는 세상이 된 거야!”
진짜 피해자. 그 말이 주문처럼 예림과 나희의 손을 떼어놓았다. 나희가 새빨개진 얼굴로 바닥에 나뒹구는 필기구와 책들을 주웠다.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책상 열을 맞추는 나희를 보니 몸이 후들거렸다. 마치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만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았다. 예림은 목소리를 쥐어짜 나희를 불러 보았다. 예림의 소지품까지 전부 정리한 나희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시 펼친 필기 노트에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예림은 교실에서 달아나고 말았다. 뒷문을 쾅 닫았지만 아이들의 비난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려면 10분 정도 남았는데 복도는 축제 분위기였다. 들뜬 얼굴을 한 아이들이 삼삼오오 창가로 모여들었다. 예림만이 귓전에 울리는 원성을 뒤로 한 채,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쏘아보았다. 마치 종잡을 수 없는 바깥의 얼음 결정체가 애써 조형한 얼굴을 갉아 먹고 있다는 듯이.
지척에서 신해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끊는 외침에 예림은 다급히 해운을 찾았다. 그가 초조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예림은 그제야 자기 얼굴이 복구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소를 짓고 해운의 사과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해운은 빠른 걸음으로 예림을 스쳐 지나갔다. 예림은 보고도 믿을 수 없어 해운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가 애타게 부르는 대상이 누군지 예림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부스스한 긴 머리와 무릎 아래까지 오는 교복 치마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세지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씩 갈라지던 지면이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작년만 해도 인사를 받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애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2학년 1학기가 시작된 뒤, 예림의 학교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가시밭길이었다. 고행도 이런 고행이 없었지만,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예림에게 김세지란 존재는 빗에 엉킨 머리털만도 못했다. 그러나 진정 초라한 존재는 누구인가? 김세지의 동정 어린 눈빛이 자신을 향한 순간, 예림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다음 화]
원표은이 새 무대로 예림의 등을 팍 떠밀었다.
그럴싸한 속삭임도 잊지 않았다.
“여왕개미가 없어지면, 남은 개미들은 어떻게 되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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