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이는 불빛

by 꿈꾸는 피터팬

어두운 겨울 저녁이나, 세상이 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않은 새벽에 길을 걷다 보면 문득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의 창, 단독주택의 작은 방, 혹은 거실 한쪽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형광등 불빛이다.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누가 앉아 있는지, 누가 서 있는지, 어떤 표정으로 저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 집 안에 불이 켜져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런데도 그 작은 불빛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해 보인다. 차갑고 메마른 겨울 공기 속에서, 그 불빛만은 세상 어느 곳보다 포근하게 느껴진다.


참 이상한 일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어느 집이나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가족끼리 부딪히고, 말이 엇갈리고, 하루하루를 버티느라 지치고, 웃음보다는 한숨이 더 많은 날도 분명 있을 것이다. 현실 속의 집은 결코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니다. 각자의 삶이 얽히고 설키며 지지고 볶는 인간군상들이 모여 사는 자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바라본 불 켜진 집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평온해 보인다. 어쩌면 실제의 모습보다, 내가 그 불빛 위에 덧씌운 마음이 더 따뜻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그 불빛이 부럽다. 너무도 단순하게, 너무도 솔직하게 부럽다. 창문 너머로 스며 나오는 흰빛 하나가, 어쩌면 누군가의 귀가를 기다리는 저녁일 수도 있고, 식탁 위에 국이 놓여 있는 시간일 수도 있고, 별말 없이 TV 소리를 함께 듣고 있는 가족의 시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 풍경이 괜히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린다. 그 안에 정말 다정함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생활의 불빛일 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게는 그 불빛이 ‘함께 있음’의 상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로서 내가 꿈꾸던 일을 하고 있고, 오랜 시간 공부하고 노력하며 여기까지 왔다. 누군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운 삶이라 말할 것이다. 아이들도 무탈하게 자라 그만하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삶이 기대했던 방향에서 아주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겉으로 보면 부족할 것이 없는 삶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 많은 인생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참 단순한 성취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직장은 각자의 시간을 요구하고, 삶은 서로를 한자리에 오래 붙들어 두지 못한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바쁘게 흩어져 살아간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고, 오늘을 유지하기 위해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주말부부의 시간이 길어지면, 혼자 있는 평일의 저녁과 새벽은 조금씩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안도감보다, 말을 건넬 사람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더 먼저 와닿는 밤이 있다. 집 안은 조용하고, 조용한 만큼 내 마음의 빈자리도 더 또렷해진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먼 곳의 불빛이 더욱 따뜻해 보이는 것은. 내가 진정 부러워하는 것은 화려한 성공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도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루를 닫는 저녁, 특별한 말이 없어도 한 공간에 머물 수 있는 시간, 각자의 피곤함을 말없이 이해할 수 있는 익숙한 기척, 그런 평범하고 사소한 온기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더 높은 곳으로 가는 일이 중요했고, 더 많은 것을 이루는 일이 삶의 목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나이를 지나고 보니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것은 결국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밝은 창 하나, 기다리는 기척 하나, 누군가 집에 있다는 사실 하나가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겨울 저녁의 불빛은 그래서 더 마음을 울린다. 바깥은 춥고 어둡다. 바람은 차고, 길은 길게 느껴진다. 그런 시간에 멀리 보이는 불빛은 마치 누군가의 체온처럼 다가온다. 저 안에는 저녁 식사가 끝난 식탁이 있을까. 소파에 걸터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나누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각자 휴대전화를 보며 침묵 속에 앉아 있을까. 어떤 모습이든 좋다. 적어도 혼자는 아닐 것 같은 상상, 그 상상이 내 마음을 붙든다. 멀리서 보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자세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따뜻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불빛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내 마음 또한 이상하거나 초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도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한다는 증거이고, 가족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행복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일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여전히 따뜻함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의미일지 모른다. 삶의 분주함 속에서도, 성취와 책임의 무게 속에서도, 결국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불빛이 부럽다는 것은 단지 남의 삶을 부러워한다는 말이 아니라, 내 안에 아직 따뜻한 저녁을 꿈꾸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음이 휑하다는 것은 어쩌면 비어 있다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그 빈자리에 무엇이 와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혼자 있는 방의 적막 속에서, 나는 멀리 켜진 불빛들을 본다. 그 불빛들은 내게 없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아직 잊지 않은 것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삶을 사람답게 만드는지, 무엇이 하루의 끝을 견디게 하는지를 조용히 말해준다.


오늘도 겨울 저녁은 어둡고, 새벽 공기는 차갑다. 멀리 켜진 집들의 불빛은 말없이 제 자리를 밝히고 있다. 그 안의 삶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어느 집이나 사정이 있고, 어느 가정이나 상처와 피로와 걱정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불빛을 본다. 그리고 여전히 따뜻하다고 느낀다. 어쩌면 사람은 완벽해서 따뜻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채 함께 살아가기에 따뜻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불빛을 바라본다. 부러움과 그리움과 쓸쓸함이 뒤섞인 마음으로. 그리고 언젠가 다시, 멀리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놓이는 그런 불빛 속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삶은 여전히 바쁘고 각자의 자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불빛 하나쯤은 끝내 꺼지지 않기를 바란다. 차가운 겨울 바깥에서 오래 서 있던 마음도, 결국은 그런 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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