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저녁은 이상하리만큼 천천히 어두워진다.
겨울 저녁처럼 날카롭게 꺾이며 내려앉는 어둠이 아니라, 아직 낮의 온기를 조금 품은 채 머뭇머뭇 저물어 가는 어둠이다. 하늘에는 빛이 남아 있는데 골목과 담장 밑은 먼저 그늘이 깊어지고, 바람은 차갑기보다 젖은 듯 부드럽다. 바로 그런 시간, 문득 어떤 냄새가 난다. 아주 향기롭다고 할 수는 없다. 꽃향기처럼 맑고 화사한 냄새도 아니고, 누가 일부러 만들어 낸 향처럼 선명한 것도 아니다. 길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땅속에서 조용히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습기가 많은 날이면 그 냄새는 더 또렷해진다. 낮 동안 데워졌던 흙이 저녁 공기와 만나며 천천히 숨을 내쉬는 것처럼,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이 봄이 왔다고 조심스레 몸을 푸는 것처럼, 그 냄새는 어느 순간 내 곁에 와 있다.
나는 그 냄새가 좋다.
좋다는 말로 다 담기지 않을 만큼, 그 냄새는 내 마음을 이상하게 어루만진다. 남들이 맡기에는 그저 평범한 흙냄새일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게는 비 온 뒤 눅눅한 길의 냄새쯤으로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그 냄새는 늘 조금 특별하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문 같다.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도, 봄 저녁의 습한 공기 속에서는 아주 살짝 열리는 문. 그 문이 열리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어느새 오래전의 시간 가까이 가 있다.
이상한 것은, 그 냄새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꼭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장면 하나가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어느 골목,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가 분명히 잡히지 않는다. 마당이 있었는지, 학교 운동장이 있었는지, 비가 왔는지, 바람이 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도 마음은 정확히 안다. 아, 이것은 그 시절의 냄새구나. 그때의 공기구나. 그때의 저녁이구나. 기억은 흐릿한데 감정만은 선명하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행복했던 시절의 결이 그 냄새 안에 남아 있다.
아마 어린 시절의 행복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행복하다는 것을 알면서 행복하지 않았다. 다만 하루가 하루로 흘렀고, 계절은 제때 오고 갔으며, 저녁은 늘 찾아왔고, 나는 그 안에 아무 의심 없이 들어가 있었다. 흙냄새가 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고, 축축한 바람이 스치면 그저 봄밤이려니 했을 뿐이다. 그 시절의 기쁨은 커다란 사건으로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몸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해질 무렵의 골목, 땅이 젖어 있던 날의 공기, 멀리서 들리던 저녁 준비 소리,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안도감 같은 것들. 아마 그 냄새는 그런 날들의 잔향일 것이다. 아무도 특별하다고 말해주지 않았지만, 지나고 나서야 가장 다정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들의 냄새.
그래서인지 그 냄새를 맡으면 마음 한구석이 먼저 풀어진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도, 내일 해야 할 일도, 오늘 끝내지 못한 일들도 잠시 멀어진다. 그 냄새 앞에서는 삶이 조금 느슨해지고, 나는 잠깐 세상과 화해하게 된다. 꼭 무엇을 얻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잊고 지내던 어떤 감각을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수많은 냄새와 빛과 소리의 층위를 몸에 쌓아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머리로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몸으로 기억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안온함, 이유 없이 밀려오는 그리움, 갑자기 가슴을 적시는 평온함 같은 것들이 모두 그 안에 숨어 있다가, 어느 봄 저녁 뜻밖의 냄새 하나에 조용히 깨어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이런 경험은 예전보다 더 자주 찾아온다. 젊은 날에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너무 분명해서 뒤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해야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과 견뎌야 할 시간들이 너무 많아, 계절이 바뀌는 소리조차 그냥 스쳐 지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앞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된다. 앞을 바라보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지나온 날들이 많아질수록 지금의 나는 그 날들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더 자주 느낀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냄새 하나, 바람결 하나, 어둠의 결 하나가 마음에 오래 남는다. 그것들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가느다란 실이 된다.
특히 봄은 그런 계절이다.
봄은 늘 새로움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내게 봄은 꼭 새것만은 아니다. 봄은 오히려 오래된 것을 데려오는 계절에 가깝다. 얼어 있던 땅이 풀리면서 묻혀 있던 냄새를 다시 올려 보내고, 마른 가지 끝에서 연한 잎을 틔우며 오래전 보았던 풍경을 불러낸다. 봄 저녁의 공기에는 새로 시작하는 생명의 기척과 함께, 오래전 내가 지나온 시간의 그림자도 함께 묻어 있다. 그래서 봄은 설레면서도 조금 아련하다. 기쁘면서도 살짝 쓸쓸하다. 돌아갈 수는 없지만 분명히 내 것이었던 시절이, 그 냄새를 따라 아주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기억을 눈으로 보기보다 냄새로 맡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진처럼 또렷한 장면은 흐려져도, 어떤 날의 공기는 오래 남는다. 누구와 있었는지 잊어도, 그날의 땅 냄새와 저녁의 습도는 몸이 기억한다. 그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는데도, 감정은 오히려 더 맑아진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어서 더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 냄새가 날 때마다 애써 의미를 붙이지 않으려 한다. 왜 좋은지, 무엇을 떠올리게 하는지, 무엇의 냄새인지를 굳이 끝까지 밝혀내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내 마음이 잠시 따뜻해지고, 오래전으로 돌아간 듯한 평안이 스며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봄날 어두운 저녁, 길에서인지 땅에서인지 모를 냄새가 올라온다.
그 냄새는 화려하지도, 선명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안의 가장 부드러운 곳을 건드린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듯, 내 마음속 어딘가에 아직 조용히 남아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다. 삶은 자꾸 앞으로 흘러가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렇게 잠깐 뒤를 돌아보게 해 주는 선물이 있다. 내게는 그 선물 중 하나가 바로 봄 저녁의 냄새다.
그래서 나는 그 냄새가 나는 저녁을 좋아한다.
그때의 나는 지금 여기 있으면서도 동시에 오래전의 나이기도 하다. 분명한 기억 하나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지나간 시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그 냄새는 조용히 알려준다. 그리고 나는 잠시 걸음을 늦춘다. 어두워지는 봄 저녁 속에서, 축축한 흙내음을 가만히 들이마시며, 지나온 시간과 지금의 나를 함께 품은 채 천천히 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