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세상 속에 아이들이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 한가운데에 내가 들어와 살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이 세상을 나의 세대가 만들었고, 내가 걷는 길이 길이었고, 내가 익숙한 방식이 삶의 방식이었다. 상점의 간판은 쉽게 읽혔고, 유행가의 가사는 귀에 익었으며, 거리의 풍경은 대체로 나를 낯설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세상은 나보다 더 빠르게 젊어졌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조금씩 뒤편으로 밀려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쉰 중반을 넘기고 보니,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들이 괜실히 마음에 걸릴 때가 있다.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하려고 해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여기 다녀도 되는 걸까?” 러닝머신 위에서 가볍게 뛰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무거운 기구를 능숙하게 다루는 단단한 몸들 사이에서, 내 몸짓만 어딘가 느리고 조심스러운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구 하나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는데도, 나는 혼자 그렇게 주눅이 든다. 어쩌면 타인의 시선보다 더 날카로운 것은 나 자신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나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먼저 머뭇거리고, 나이들어가고 있음을, 같은 공간에 있지만 이방인인 듯 자각한다.
패스트푸드점에서도 비슷한 마음이 찾아온다. 혼자 햄버거를 먹으러 들어갔다가도 문득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형형색색의 포장지와 빠른 음악, 키오스크 앞에 익숙하게 서 있는 젊은 사람들 틈에서 나만 시간이 조금 다른 시간 속에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계산대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는 짧은 순간에도 말이 한 번에 잘 통하지 않는 듯해 괜히 머뭇거리게 되고, 키오스크 앞에 서면 남들은 금세 끝내는 일을 나만 오래 붙잡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서글퍼진다. 한때는 세상이 내 것이었던 것처럼 느껴졌고, 나 또한 트렌드의 한가운데를 자연스럽게 걸어가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이러한 마음에 햄버거 하나를 먹는 일이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닌데, 괜히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생각하게 된다. “나이에 맞지 않게 보이지 않을까”, “혼자 와서 외로워 보이지는 않을까”,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실은 누구도 내게 큰 관심이 없을 텐데, 나는 혼자서 그런 생각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그러고 보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몸이 조금씩 늙어 가는 일만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자기 자신을 자꾸 의식하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거리를 걸을 때도 그렇다. 예전에는 간판만 봐도 무엇을 하는 곳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발소, 문방구, 다방, 세탁소, 분식집. 이름만으로도 냄새와 풍경과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함께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간판을 보아도 무슨 상점인지 짐작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영어인지, 줄임말인지, 브랜드인지, 카페인지, 편집숍인지, 스튜디오인지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간판은 있는데 의미는 흐릿하고, 문은 열려 있는데 어떤 세계가 그 안에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세상은 점점 더 세련되어 가는 것 같은데, 나는 오히려 단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잠시 멈춰 서게 된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오래전의 풍경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골목에는 설명이 필요 없는 가게들이 있었다. 철물점은 철물점의 냄새가 났고, 빵집은 빵 냄새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구멍가게 앞 아이들은 동전을 쥐고 서 있었고, 어른들은 그 곁을 느리게 지나갔다. 그 시절의 세상은 조금 단순했고, 조금 느렸으며, 그래서 덜 불안했다. 물론 그때도 삶은 고단했고 세상은 늘 완전하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는 감각은 있었다. 내가 이 세계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는 안도감, 내가 여기서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따뜻한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자꾸 새로운 언어로 말을 건넨다. 빠르게 바뀌는 유행, 기술, 문화, 감각 앞에서 나는 종종 번역이 필요한 사람이 된다. 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나는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배우고, 한 번 더 망설인다. 그래서 문득, 이 세상이 더 이상 내 세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드넓은 무대 위에, 나는 조용히 배경 인물처럼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젊음이 중심이 되고, 속도가 기준이 되며, 새로움이 가치가 되는 세상에서, 나는 점점 ‘예전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꼭 슬픈 일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가 젊은 날의 중심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동안, 새로운 중심은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에게로 옮겨 간다. 세상은 원래 그런 식으로 흘러왔을 것이다. 한때는 나도 새롭고 낯선 감각으로 이전 세대를 당황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누렸던 젊음의 특권 위에서 누군가는 같은 외로움과 낯섦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느끼는 서운함과 머뭇거림도, 어쩌면 삶이 흘러가는 아주 자연스러운 한 장면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느냐가 아니라, 그 변화 속에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는 일일 것이다. 헬스클럽에서 조금 느리게 운동하면 어떤가. 패스트푸드점에서 혼자 햄버거를 먹으면 또 어떤가. 간판의 뜻을 몰라 잠시 멈춰 서면 어떤가. 그것은 뒤처짐의 증거가 아니라, 내가 다른 계절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는 흔적일 뿐이다. 젊음이 속도의 계절이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도 의미의 계절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빨리 아는 것보다 깊이 느끼는 것이 많아지고, 많이 가지는 것보다 오래 바라보는 것이 중요해지는 나이. 그런 나이의 마음이 비록 세상과 조금 어긋나 보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초라한 일이 아니다.
나는 아직도 배우고, 아직도 낯설어하고, 아직도 가끔은 위축된다. 하지만 그것이 곧 내가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만이 자신의 시간도 함께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소외의 고백이면서도, 동시에 겸허함의 고백일지 모른다. 이제 세상은 내게 익숙함만을 주는 곳이 아니라, 여전히 배워야 하고 이해해야 하며 때로는 용기를 내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금 어색한 마음으로 헬스클럽 문을 열고, 키오스크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며, 낯선 간판이 걸린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젊은 세상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는 마음으로. 비록 세상이 예전 같지 않더라도, 나 역시 예전의 나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잃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익숙함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생의 후반부란, 세상의 중심에 서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중심에서 조금 비켜선 자리에서도 자신의 온기를 지키는 법을 배우는 시간일 것이다. 아이들의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 해도 괜찮다. 그 세상 속에서 나는 여전히 하루를 걷고, 여전히 무언가를 느끼고, 여전히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으니. 그리고 어쩌면 삶이란 끝내, 중심에 있었는가보다 누구의 세상 속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낼 수 있었는가를 묻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