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버들 Sep 29. 2022

도심 산책로의 도토리나무

산책길에 있는 도토리나무이야기(참나무류)


매일 산책하는 동네 산책길에 아름드리 참나무가 늘어서 있는 산책로가 있다.

물론 참나무 틈새에 소나무도 있고 메타세쿼이아도 있고 양버즘나무도 서로 키재기를 하고 늘어서 있다. 한 여름에는 너른 품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아침 공기를 더욱 싱그럽게 하는 매미들이 깃들어 살며 정겨운 합창소리도 들려주는 고마운 나무들이다.

한여름의 더위가 가신 9월의 지금은 매미들의 노랫소리를 대신해  풀벌레 소리가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풀벌레 소리가 또르르르 커질수록 산책길의 나무들 중에 가장 으뜸인 참나무들이 도토리를 열고 당당히 제 모습을 자랑하는 요즘이다.

동네 산책로의 신갈나무

참나무는 이파리의 모양에 따라 각자 어엿한 이름을 지니고 있으나 도토리를 열고 있으면 무조건 다 참나무라고 혹은 도토리나무라고 퉁쳐 불리는 나무.

다행히 이렇게 ‘떡갈나무’ ‘상수리나무’라는 이름표를 줄기에 매달고 있는 참나무도 있어 오고 가며 이파리와 이름표를 보며

“아하, 네가 가장 큰 이파리를 지닌 떡갈나무구나, 그래 상수리나무 네 이파리는 길쭉하고 크기가 좀 작구나.” 중얼중얼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

산책로의 참나무중에서 상수리나무에 가장 많은 도토리가 열렸다. 날카로운 가시를 지닌 듯한 길쭉한 이파리 사이마다 조롱조롱 매달린 도토리들이 귀여운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척박한 산책로 길가에 자리 잡은 탓에 충분한 영양과 물도 부족하고 뜨거운 한 여름의 땡볕을 견뎌내고는 이렇게 가을이라고 도토리를 잔뜩 매달고 있는 모습이 장하다. 물론 상수리나무 입장에서는 하나의 자손이라도 이 땅에 남기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으로 맺은 열매라지만 고개 들어 바라본 내게는 그 모습이 대견하고 신기롭기만 하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산책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도토리나무(상수리나무)라니....

도토리가 잔뜩 열린 상수리나무

퇴직을 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30여 년을 이어온 이른 새벽 기상 습관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내 몸에 문신처럼 남아있다. 새벽 5시 50분경이면 몸에 각인된 기상 습관이 저절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게 한다. 아직 애 노인네라 할 수 있는 나인데 벌써 상노인네 처럼 부스스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새벽 산책길에 나선다.

오늘도 여지없이 참나무가 우거진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저 앞에 어르신이 허리를 숙여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도토리를 줍고 있었다.

도토리를 제법 주웠는지 바지 주머니 한쪽이 불룩하니 불거져있다.

가까이 다가가

“어르신, 도토리를 주워다 어떻게 하세요?”하고 여쭈니

“아이고 애들은 궁상맞게 도토리나 줍고 다닌다고 뭐라고 하지만 이거 줍는 게 재미있다우. 이 거 손이 아주 많이 가는 거거든.” 하신다.

그러면서

“주워다가 말려. 그래 껍질을 일일이 까져야 해. 그다음에 물에 도토리를 한참 울 거서 떫은맛을 빼서 햇볕에 말려야 해. 아유 그게 끝이 아뉴. 말리면 곱게 갈아서 물에 헹궈. 가루를 헹군 물을 가만히 두면 바닥에 앙금이 가라앉아. 그 앙금을 다시 말려야 해. 아휴 손이 정말 많이 가. 그래도 재미있어서 이렇게 매일 나와서 도토리를 줍는다우.”하신다. 듣기만 해도 도토리를 손질하는 과정이 너무 복잡해 머리가 아프다. 어르신의 주머니에 불룩하게 담긴 도토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험난한 과정이다.

도토리를 줍는 어르신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신갈나무 밑동을 보니 도토리 알맹이를 떨구어 내 빈 모자들이 제법 뒹글고 있었다.

겨울에는 산짐승들의 먹이요 도토리나무에게는 치열한 자손 남기기의 열매이지만 다람쥐도 없는 이곳에서는 사람들의 매서운 눈길에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주머니 속으로 비닐주머니 속으로 담겨지고 마는 도토리.

신갈나무 둥치에 떨어진 빈 도토리 모자

어느 책에서 읽었던가.

땅속에 뿌리를 내려 움직일 수 없는 식물에게 유일무이하게 이동의 자유가 주어지는 시간이 바로 열매(씨앗)의 시기라고...

비록 나무에서 자유낙하로 떼구루루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지만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 움직여 땅에 몸을 묻힐 수 있는 유일한 시기.

불행히도 이 산책로의 도토리들은 그 몸이 땅에 묻히기도 전에, 다람쥐의 먹이가 되기도 전에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길을 피하지 못한다.

한참을 걷다 보니 거위벌레가 도토리가 달린 상수리나무 줄기를 툭 잘라 땅으로 떨어뜨린 것을 보았다. 거위벌레도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자기 알을 도토리에 낳아 땅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도토리나 거위벌레나 사람이나 모두 다 이 땅에 자손을 남기기 위한 치열하고 성스러운 행위의 흔적이다.

거위 벌레가 잘라 떨어뜨린 상수리나무 줄기

도토리 열매의 최종 목적인 땅속에 묻혀 운 좋게 새싹으로 움트지는 못하지만, 신새벽에 일어나 긴긴 하루의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야 하는 어르신들에게 도토리 줍기라는 즐거운 소일거리를 주고 있으니 그 얼마나 기특한 참나무의 도토리인지....

발길을 멈추고 상수리나무 둥치 아래를 찬찬히 살펴보니 도토리들이 몇 알 눈에 보였다.  한 알 한 알 눈에 보이는 도토리를 줍다 보니 제법 재미가 쏠쏠했다.

주운 도토리를 저 멀리 계신 어르신에게 갖다 드리니 무척 고마워라 한다. 별것도 아닌 일에 고맙다며 함박 미소를 짓는 어르신의 주름진 얼굴에 환한 햇살이 드리운 아침이다.

산책길에 주운 도토리

어르신의 손에 주운 도토리를 넘겨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바쁜 발길에 톡! 하고 실한 도토리 한 알이 떨어졌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 이동의 소리, 가을이 깊어지는 소리다.

어미나무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열매에 각인된 발아의 기회를 찾아 발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산책로 둑 숲 속에 던져주었다.

내가 던진 도토리 한 알이 산책로 언저리 어디에선가 무사히 겨울을 이겨내서 이 땅에 무수한 도토리를 떨어뜨리며 새 생명이 이어지기를 소원했을  어미 나무의 간절한 바람이 이뤄지도록 기원을 하면서.....

발아래 툭 떨어진 실한 도토리 한 알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